“선생님. 제가 바보에요. 입원해 있는 동안 팔 운동을 게으르게 해서 마비가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아요. 다리는 돌아와서 이렇게 걸어 다닐 수도 있는데요.” 4년 전 뇌(腦) 안으로 출혈이 되어 왼쪽 반이 마비된 환자가 외래 진찰실에서 말하고 있다. 얼굴이 검게 햇볕에 끄슬려 있다.
“고향에 돌아가니 죽은 사람이 살아왔다고 놀라잖아요. 사람들은 제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데요. 제가 보던 이장도 딴 사람으로 바꿔 놓았고요.” 이장 일을 넘겨준 것이 몹시 아쉬운 듯 말했다.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잘했어요. 아주 잘 하지는 못했지만요. 대학도 갈 수 있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못 갔어요. 아침에 농사일을 하고 학교에 가면 11시가 넘었어요. 담임선생님은 아침에 출석을 부르지 않고 오후 종례시간에 출석을 불렀어요.” 갑자기 눈가가 붉어진다.
“직행버스는 발판이 높기 때문에 못 타고 완행을 타고 병원에 오고 갑니다. 어떤 운전기사는 제가 버스에 잘 오르지 못하면 운전석에서 내려와 거들어 주지만 어떤 기사는 어기적거리는 저를 보고 눈을 흘기기도 해요.”
삶을 직행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완행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제가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빠르게 걸어가면 1시간, 천천히 걸어가면 1시간 반이 걸려요. 큰길 보도로는 가지 않습니다. 군데군데 보도 불록이 빠져있어 넘어지기가 쉬워요. 시장 안으로 난 길을 따라서 걸어갑니다.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말입니다.” 시외버스를 타는 정거장까지의 거리를 가늠해 본다. 차를 몰고 가도 30분 넘게 가야할 거리다.
“그래도 저는 괜찮은 편이에요. 말도 하고 이렇게 걸어 다닐 수도 있잖아요. 우리 동네 노인정에 가면 나보다 못한 사람이 많아요. 말도 못하고 휠체어에 태워 놓으면 하루 종일 그대로 있는 사람들 말이요. 나는 병신이지만 그들은 등신들이에요.”
자기 말을 들어주는 내가 무척 고마운 모양이다. 집안에서는 왜 천덕꾸러기가 아니겠는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루 종일 식물처럼 앉아 있는 이들 앞에서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 해도 신이 나겠는가?
간호사가 다음 환자를 보라고 눈짓을 한다. 컴퓨터 좌판에 처방을 쓰고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본다. 문득 그가 고향의 노인정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부처로 보인다. 주위로는 여러 명의 등신불(等身佛)들이 둘러싸고 있다. 뒤에는 관세음보살 같은 담임선생이 서 있기도 하다. 눈가에 맺혀있는 물기에 햇살이 비쳐 내 눈에 그렇게 보이는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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