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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창문이 건네는 이야기 / 조재은

창문이 건네는 이야기 / 조재은

 

 

 

 

책상 위로 오랜만에 밝고 따스한 봄볕이 스며들어 창문을 열어 봄을 맞는다. 건너편 아파트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곳에 봄은 보이지 않고 네모난 콘크리트만 연속으로 보인다. 사각의 똑같은 어두운 창들은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창문에서 같은 표정, 같은 각도로 팔을 올리고 행진하는 나치 군대의 모습이 스친다. 건물 안에는 분명 똑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데 왜 창은 모두 같아야 할까. 베란다 밖에는 화분 하나 없이 콘크리트 덩어리다. 회색의 절망이다.

 

작년 빈에서 석 달을 머무는 동안, 집에서 가까운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 자주 갔다.

오스트리아 미술가이며 건축가인 훈데르트바서는 직선의 획일적인 건물을 보면 불행해 지고 모두 감옥에 갇혀 있는 듯이 보이고, 너무 끔찍해서 자심마저 싫어진다고 했다. 세상에 어느 것도 똑같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그는 볼 때마다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건축을 꿈꾸었다. 훈데르트바서의 스승은 자연이고 생각의 원천은 자연에서 흘러 나왔다. ‘신은 직선을 만들지 않았다며 직선을 인간성의 상실이라고 한 그의 자연주의는 (Hundert 훈데르트)의 물(Wasser 바서)” 이라는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건축에서 물은 순한 시냇물처럼 흘러 그 안에 손을 정하게 씻고 편안히 몸을 담고 싶게 한다. 그림에서는 거친 강물이 되어 삶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는 다섯 개의 피부에 대해 말한다. 첫 번째; , 두 번째; 의복, 세 번째; , 네 번째; 사회적 환경과 정체성, 다섯 번째는 생태주의를 말한다.

3의 피부인 집에서 그가 사람에 대한 배려와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을 느낀다. 그는 건물의 지붕과 창, 바닥, 기둥을 창조의 원형인 곡선으로 만들었다. 그의 생각을 건축으로 옮긴 곳이 훈데트바서 하우스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서는 바람이 살고 흙은 숨 쉰다. 옥상에 나무를 심고 층의 중간 공간에 둔 나무는 햇빛을 따라 건물 밖으로 뻗어 있다. 건물과 자연이 어우러진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호빗 마을을 훈데르트바서의 설계로 만들어진 불루마우 온천지를 세트로 촬영된 곳이다. 그의 건축물을 보고 있으면 동화적이고 목가적인 호빗 마을에 사는 영악하지 않고, 평화로운 호빗족 같은 마음이 된다. 원색을 가로로 넓게 풀어놓은 듯한 벽과 창문은 어린 시절 가졌던 수채와 물감이 담긴 팔레트 같다. 훈데르트바서의 창문 가장자리는 벽의 색과 하모니를 이룬다. 오렌지색 벽에는 파랑으로 창을 칠하고 보라색 벽에는 빨간 테두리로 시선을 끈다. 색이 꿈을 꾸게 한다.

크기가 다르고 색이 다른 창문은 저마다 한 가지씩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하다. 크기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며 색들은 서로 몸을 비비댄다. 창문마다 다른 서정이 흐르고 서사가 살아있다. 창문을 열고 누구라도 얘기를 시작하면 깨끗한 수필 한 편, 절창의 시 한 편르 읊을 것 같다. 창문들은 나에게 그 창문 안에 있는 사람들의 깊고, 얕은, 진하고, 흐린 살아 있는 숨결이 전해진다.

훈데르트바서는 건물에서 창문권을 주장한다. 창문마다 다른 사람이 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자신의 창문을 에워싼 공간만큼은 스스로 꾸밀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틀 위에 그려진 작은 사다리꼴 모양은 왕관 같아 자연과 창조에 순응하며 사는 당신이 왕이라고, 왕관 하나씩을 그려 넣은 것 같다.

자연에 직선은 없다. 자연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폐쇄되어 있지 않고 열려 있는 곡선이어야 한다. 꽃잎의 둥근 곡선, 잎새의 예민한 곡선, 구릉의 겸손한 곡선, 눈물 흘리는 마음의 곡선, 그리고 무엇이든 안아주는 팔은 곡선이다. 이 선에 얼굴을 파묻어야 하는데.

창문 너머 존재하는 실재의 실체들을 본다.

곡선을 싫어하면서도 직선적인 면을 가진 내가 있다. 건너편 창밖에 서서 창 안쪽에 있을 곡선의 삶을 공경하는 나. 다양한 창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유로운 공기가 조금씩 다가온다. 열린 공간에 서서 하늘에서 주는 대로 빛을 받으며 닫힌 마음은 치유를 받는다. 심연에 있던 획일적인 네모가 수십 개의 다양한 곡선과 색으로 입혀지고 살아남을 본다.

회색 일색인 우리 아파트 벽. 건너 건물에서 보면 작은 초록이 한 점이라고 보이라고, 먼지 쌓이고 비어 있던 베란다 화분대에 시클라멘 화분 하나 조용히 내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