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를 보내는 마음으로 / 이정림
― 나는 왜 수필을 쓰는가 ―
삼십대 초반은 실의에 빠져 칩거의 나날을 보내던 암울한 시기였다. 이 암울은 그 이전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나, 좌절은 그 이후에 서서히 나를 무기력으로 탈진시켜 갔다.
날마다 나는 생이 거기에서 끝나 버리는 것 같은 절망과 실패에 대한 회한(悔恨) 속에서 언제까지고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치에서 빠져 나오듯 나로부터 해방되는 변화를 맞이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전기(轉機)였다.
‘기요메’는 불시착한 안데스 산맥에서 그의 생사를 몰라 애태우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이 구조자가 되어 한 발 한 발 그들에게로 다가갔었다(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그가 얼어터진 발꿈치가 들어갈 수 있도록 구두 뒤축을 수없이 잘라 내며 필사적인 행군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죽음보다 강했기 때문이다.
문득 기요메가 떠올랐다. 나도 어디선가 내가 재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나의 건재함을 알려야 한다. 그들에게 내 생명의 손짓을 보내야만 한다.
사랑보다 더 깊은 연민으로부터 그들을 구제해야 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을 구제함으로써 나 또한 구제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날카롭게 내 미망(迷妄)을 흔들어 놓았다.
“나, 여기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맑은 정신으로 이 한마디 말을, 나는 장문의 봉함 편지가 아닌 한 장의 엽서에 띄워 그들에게 보냈다. 내 엽서, 그것은 곧 수필과의 만남이었다.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나는 이렇게 수필을 시작하였고, 거기에 나의 정신을 걸었다.
수필은 깃발이었다. 내 존재를 알릴 수 있는 훌륭한 표적처럼 수필은 언어의 깃발이 되었다. 나는 그것에 열정적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의 바탕도, 그것의 빛깔도, 그 생김새도 돌아볼 여유가 없이 다만 깃발은 휘날리는 사명만을 지니고 있었고, 나는 그것에 도취했다.
그러나 알리고자 하는 조급증이 조금씩 해갈되어가자, 그제야 비로소 깃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않았고, 힘차지도 않았다. 나는 여태껏 그냥 보아도 부끄러울 자신의 모습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어대는 어리석음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습작들을 통해서 얻은 것이 있었다면, 글을 대하는 자세에 비로소 조심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조심성은 쓰고자 하는 의욕마저 쇠잔시켰고, 마침내 수필은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피천득, <수필>)이라는 문구에 자위하듯 침잠해 버렸다. 서른여섯이 되면 문장도 닦이고 생각도 무르익어 놀라운 작품을 써 낼 수 있는 기적이라도 올 것 같은 기대 속으로 나는 도피하고 말았다.
오랜 휴식은 점차 자신감을 부식해 갔고, 대신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마침내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게 되었다. 수필은 이제 나를 구원하는 깃발이 아니라 나를 구속하는 질곡(桎梏)이었다.
그 속박에서 또다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것에 다시 열중하는 길밖에 없다는 모순에 부딪히고 말았다.
서른여섯은 아무런 기적도 동반하지 않은 채 다가왔고, 나는 더 이상 들어앉아 있을 구실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어느 사이 나는, ‘수필’이라는 항구를 향해 떠나는 배 위에 다시 올라와 있었다.
기적(汽笛)이 울렸다. 내 등을 밀어 올린 그 손으로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처음에는 내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다가갔던 것이, 이제는 그들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내게 격려의 손짓을 보내고 있다. 그들을 위해서 나는 출발해야 한다. 그들을 위한 출발, 그것은 수필과의 재회(再會)였다.
그래서 내 수필에는 인연이라는 것이 중요한 제재(題材)로 다루어진다. 그리고 내 수필은 자연에서보다 인간에게서 정과 아름다움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인간에 대한 이 끈질긴 사랑을 통해서 나는 구원과 절망을 동시에 얻는다. 환희하고 상처받고 후회하면서도, 내 관심은 그들을 빗겨 갈 수가 없다. 그들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수필을 두고 흔히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수필을 그렇게 써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내 글에는 긴장이 겉으로 내비친다. 글 속의 내 표정은 스냅 사진의 그것이 아니라 증명사진을 찍을 때의 모습과 같다. 노력한 흔적이 겉으로 드러나 읽는 이로 하여금 부담감을 갖게 한다면, 그것은 역작이라기보다 미숙(未熟)이라 하는 편이 적합할지 모른다. 붓 가는 대로 쓸 수 있고, 그렇게 편안하게 읽힐 수 있는 글을 쓰기란, 글도 인격도 모두 원숙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만이 가능할 수 있으리라.
내가 쓰고 싶은 수필은, 수필을 격하시키고자 하는 의미로 많이 쓰이는 그 붓 가는 대로 ‘쓴 것 같은’ 수필이다. 붓 가는 대로 써 버린 글이 아니라 붓 가는 대로 쓴 것 같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유치한 센티멘털리즘과 속기(俗氣)를 삭혀야 하고, 또한 기교보다는 평범해 보이는 문장 속에 옥돌을 심는 차원 높은 멋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수필에서 시도하고 싶은 것은, 수필의 서정성에 현실 참여적인 시각을 접목(接木)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거기에 지성의 꽃을 피워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욕심이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먼저 이런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수필이란, 글보다 마음을 닦아야 하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속이 꽉 들어찼으면서도 비어 있는 듯이 보이는 글. 열정을 품격으로 삭여 낼 줄 아는 글. 약해 보이나 무력하지 않은 글. 번설(煩說)로써가 아니라 아름다움으로써 감동을 주는 글.
또 욕심을 부리자면, 나는 그런 수필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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