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웃게 하는 건, 너야 / 오차숙
바다
나를 웃게 하는 건, 너야.
화진포해수욕장 모래사장 위로 바람이 스쳐 간다. 멀리서 갈매기 한 마리가 납 같은 바다를 향해 파수꾼으로 서성인다. 시공을 초월한 채 돌섬을 응시, 영혼의 충돌을 거듭한다. 정신의 충만함을 음미했는지 레몬 향 같은 바닷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영원을 꿈꾸고 있다.
절대적인 세계를 향해 발버둥치고, 눅눅한 고뇌 껍질을 톡톡 씹어 가며, 황금빛 바다를 날아다니고 있다.
바람이 유혹한다.
시간이 바둥댄다.
삶은 어떠한 그림으로 형상화되든지 그 자체가 의미가 없진 않다. 갈매기는 존재감을 뼛속까지 절감하며 초월의 순간을 체험하려는지, 돌섬의 경계선을 향해 날아갈 기세로 옷깃을 여민다.
바람
나를 웃게 하는 건, 너야.
수평선 끝자락까지 파도가 몰아친다.
그 와중에도 갈매기는 섬과 섬 사이를 유랑하기 위해 집시로 거듭나고 있다.
넓은 바다 한가운데 처연하게 자리 잡은 섬과 섬들, 느낌과 느낌만을 조심스럽게 훔쳐보며 무릉도원을 상상하는 갈매기, 의식을 조용하게 조율하지만 무언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갈매기가 고함지른다.
샛바람이 퍼덕거린다.
바람은 돌섬의 대국을 유랑하기 위해 대로(大路)를 건설하고 있다. 로맨틱한 쉼터를 찾으려고 방랑자가 되고 있다.
태양이 내리쬐는 날이면 리듬의 선율을 타면서 작업을 멈추지 않았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빨간 우산과 파란 우산을 펼치며 산성비를 막아냈다. 눈이 쏟아지는 날이면 염화나트륨을 준비했으며, 태풍이 몰아치는 날에도 그와의 협상을 마다하지 않았다.
여객선
나를 웃게 하는 건, 너야.
캄캄한 밤, 성난 바다 위를 질주하는 여객선, 그러나 갈매기는 이상향의 돌섬에 도달하기 위해 갑판 사이에 숨죽이고 앉아 있다.
여객선은 불안하나 투명하고 예술적이다.
연옥의 세계를 향해 질주하는 여객선, 갈매기는 운명임을 인정하고 섬과 섬 사이를 여행하며 극락세계를 탐색한다. 예술적인 그 세계는 예술을 지향하는 영혼에겐 담아 두지 않으면 안 될 피 묻은 피난처, 진지하게 느껴야만 될 불멸의 마그마다.
파도
나를 웃게 하는 건, 너야.
파도가 칼날을 밟으며 노래를 부른다.
불완전함 속에서도 샛노란 꿈을 꾸고 있다. 갈매기 날개에도 알지 못할 시간들이 토막토막 흘러간다. 거센 춤사위에 휘말려 침몰 위기에 서서 웅웅거리고 있다.
누군가가 닻줄을 내리려고 갑판 위로 뛰어오른다. 물살을 휘 가르며 평정을 찾는 여객선, 성난 파도는 시간이 갈수록 그림자를 따라다니며 핏빛으로 용해된다.
멀리, 섬과 섬 사이에 알지 못할 물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물체는 쉬지 않고 닻줄을 내리라고 고함을 지르고 있다.
중천에 떠 있는 여객선은 바다 한가운데 멈출 수가 없다. 그러나 격렬한 파도 속에서도 돌섬을 향해 질주해야 할 의무가 없지 않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갑판 위에 숨어 두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갈매기, 현기증이 밀어닥치는 풍경을, 거센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마음과 마음, 두 손과 두 손을 모아 랩송(Rapsong), 아니 기도송을 부를 수밖에 없다.
대지(大地)가 되어 풍랑과 풍랑을 잠재울 수밖에 없다.
등대
나를 웃게 하는 건, 너야
빛과 어둠의 충돌이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나 멀리서 생명의 빛이 보였다. 의식을 세탁해 주는 소중한 세탁기, 갈매기 한 마리가 돌섬을 향해 날아가는 길은 외롭고 험난했다.
파도가 심해 뱃길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태풍이 몰아쳐 객선을 안전하게 운항할 수가 없었다. 천지가 캄캄해 하늘과 땅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십자가의 보혈처럼 고독한 섬, 그 불빛, 난파 직전의 여객선을 위해 구세주가 되려는가.
아니다.
아직도 두 날개를 쉬게 하며 안식할 시간이 다가오진 않았다. 섬에서 축제를 벌일 시간이 다가오진 않았다.
영혼의 연회장, 그 귀한 축제장에 당신이 초대 받을 수 있을까.
하지만
나를 웃게 하는 건,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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