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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저녁노을 / 최원현

저녁노을 / 최원현 

 

 

 

 

도시 생활에 젖어 버린 내게 저녁노을은 반가운 충격이었다. 콘크리트 숲 속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소중한 것을 찾은 느낌이었다. 나는 홍시 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분명 홍시 빛이었다. 홍시 빛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30년도 넘게 묻혀 있던 그리움 하나가 고개를 번쩍 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방학을 맞아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내려갔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할머니께서 뭔가를 내오신다. 커다란 장도감이었다. 이곳에선 이렇게 큰 감을 보기가 어려운데 누군가 갖다 드린 모양이다. 헌데 할머니께선 그 감을 보자 방학이면 내려올 내 생각을 하셨고, 그래 그걸 쌀독에 넣어 두셨던 것이다. 잘 익은 홍시가 되라는 바람 가득.

 

헌데 그 겨울에 나는 내려가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감을 내가 못 먹은 것을 안타까워하시다가 보여라도 주겠다며 다음해 내가 내려갔을 때까지 두셨다는 것이다. 백태가 끼고, 쌀벌레가 묻어 있고, 역겨운 신 냄새까지 났다. 그러나 그런 냄새까지도 할머니의 사랑을 생각하니 가슴에 아리아리 전율로 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어디까지일까.

 

밤차를 타기 위해 해으름녘에 집을 나섰다. 늘 넘어 다니던 산마루에 지는 해가 걸려 있었다. 노을은 할머니의 그 큰 감 홍시 빛이었다. 건드리면 분홍빛 진액이 툭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커다란 홍시 감이 서산 마루에 걸려 있었다.

 

빨리 가라는 재촉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기자 기다렸다는 듯 해도 슬쩍 산을 넘고 만다. 그렇게 넘어가 버리는 저녁 해가 어느 순간 내 곁을 훌쩍 떠나 버릴 할머니 같아 가슴이 아렸다. 한참을 가다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아직도 그대로 서 계신다. “그만 들어가세요!” 외쳐댔지만 목소리는 울음으로 잦아들고 만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기도인지 독백인지 모를 말만 되풀이했다.

 

그날의 홍시 빛 노을을 다시 본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아니 계신다. 그러고 보면 인생의 황혼 또한 아름다운 자연의 순리가 아닌가. 할머니가 받아들인 순리를 이제 내가 받아들일 차례가 된 것이다.

 

노을이 할머니의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서 가!’ 그런데 어디로 가라는 말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