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 수필]최고의 러브신, 그 뒤에 숨은 뜻 / 조재은

최고의 러브신, 그 뒤에 숨은 뜻 / 조재은 

사랑과 영혼 

 

 

 

영화에서 사랑은 끝없이 진부하게 다루어져 왔지만, 아직도 관객은 지치지 않고 사랑의 장면을 보고 싶어 한다. 영화를 보고 기억에 남는 장면은 스펙터클하거나 숨을 멈추게 하는 스릴 있는 것보다 조용하고 가슴에 와 닿는 러브신이다. 그 장면에서 보았던 주인공의 눈빛이 그립고 몸짓이 다시 보고 싶어진다.

 

2003, 영국 BBC 방송에서 현재까지 나온 영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러브신 순위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수많은 영화 중에 관객이 1위로 뽑은 것은 사랑과 영혼에서 물레를 돌리는 연인을 남자가 뒤에서 포옹하는 장면이다. 격렬하지도 않고 화려한 장치도 없는 이 장면이 왜 가장 아름다운지, 비디오테이프를 수없이 되돌려 보았다.

 

로맨틱 판타지 영화인 사랑과 영혼의 원제는 Ghost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길에서 갑자기 죽은 남자의 영혼이 차마 연인을 떠나지 못하고 지켜 준다는 내용이다. 죽어서도 사랑한다는 애틋한 내용과 주제곡 Unchained Melody가 영화를 유명하게 했지만 이 화면이 흘러가지 않고 정지 상태로 머리에 남아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 장면의 배경에는 도자기가 있고 점토 묻은 주인공의 손이 있다. 도예가인 여인의 손과 그 위에 포개진 남자의 손이 함께 도자기를 빚는다. 영혼의 합일을 뜻한다. 카메라는 완성된 도자기들을 여러 개 올려놓은 선반을 보여 주고 물레에서 돌아가고 있는 성형 중인 점토를 클로즈업시킨다. 사랑에 내재되어 있는 인내, 눈물, 침묵이 도자기의 속성으로 다가온다. 사랑의 인내와 도자기의 완성 과정은 행로가 같다.

 

부드럽던 점토는 1,200도 이상의 고열을 고통 속에 견디어 내야 비로소 세상에 나온다. 산고보다 더한 고통을 견디는 동안 부드럽던 형질은 단단하고 강해져 어떤 불도 견딜 수 있게 된다. 큰 화재가 휩쓸고 지나간 집터를 보면 나무는 재가 되고 철은 녹아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지만, 도자기는 마지막까지 형체를 보존하고 있다. 이미 고온의 연마를 거쳤기 때문에 화재로 인한 열을 견디어 낸 것이다.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가는 사랑의 모습과 같다. 사랑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4절에서 7절 사이에 사랑의 특징을 16가지로 묘사해 놓았는데 인내에 관한 것은 세 번 반복된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성경에서도 사랑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인내라고 말한다.

 

사랑이 눈물을 잉태하고 있는 것처럼 도자기에도 숨어 있는 눈물이 있다.

 

도자기를 빚을 때는 물이 점토 입자의 윤활제 역할을 한다. 성형시키기까지 도공은 손에 끊임없이 물을 묻히고 물레를 돌린다. 도자기는 건조 과정에서 모세관을 통해 수분을 증발시킨다. 이 때 달아나는 물을 수축수라 한다. 수축수가 떠난 자리는 미세한 틈이 생긴다. 완성을 위해 절대 필요했던 것이 완성을 위해 다시 떠나야 하는 비극의 흔적이다. 사랑이 아픔을 동반하고 가슴에 상흔을 남기는 것과 같다. 조선 시대의 막사발 굽을 보면 울퉁불퉁한 작은 점 같은 것이 있다. 가마에 넣어 구울 때에 서로 붙지 말라고 밑에 괴는 규석 받침이다. 이것을 참깨씨앗, 또는 눈물흔적이라고 한다. 눈물흔적, 떠나는 것이 영원한 머무름이고, 봄의 새순이 이미 낙엽을 향하고 있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이름이다. 눈물 없는 사랑은 시작도 하지 않은 사랑이리라.

 

사랑의 가장 깊은 곳에 침묵이 있듯이 도자기에도 깊은 침묵이 있다.

  

정열의 절정에 이르는 순간, 그 순간, 영혼 속에는 엄청난 침묵이 찾아온다.’ 사랑은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부터 고유함과 순수를 잃고 퇴색하기 시작한다. 사랑 앞에서 언어는 한없이 초라하다. 오히려 침묵이 사랑의 언어를 완성시켜 준다. 뜨거운 열 속에서 고통과 신음을 토해 낸 도자기는 열이 식은 후, 견고해진 흙 속에 침묵으로 인내와 눈물을 숨긴다. 열기와 물기가 사라진 결정체는 고요하다.

 

집에 꽃을 꽂아 놓는 백자 화병이 있다. 꽃이 꽂혀 있을 때는 화려한 꽃이 먼저 보여 화병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했다. 어느 날 시든 꽃을 버린 후, 도자기는 문갑 위에 도자기 자체로 존재했다. 오래 시선을 멈추었다.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고 속이 빈 채 홀로 있는 백자의 빛은 처연하고 아름다웠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삶의 순간순간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다. 타인이 내 안의 모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가장 아름다운 러브신 사랑과 영혼에서 비어 있는 도자기의 이미지는 욕망과 이기가 섞이지 않은 사랑의 이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