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의 전설 / 백임현
경기도 파주, 우리 고향 집안에는 장단사람이 많았다. 장단이 친정인 윗대 아주머니와 새댁도 있었고 장단으로 시집을 간 언니들도 여럿 있었다. 지역 간 정보가 어두웠던 옛날에는 연줄혼인이 많아 한 번 연이 닿으면 얽히고설켜 계속 인연이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파주와 장잔 사이에는 임진강이 있다. 옛 시절 임진강은 이 지역을 왕래하는 뱃길이자 중요한 통로였다. 경의선 철도가 있었지만 찻길보다는 손쉬운 뱃길을 이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우리가 어릴 때 어른들은 임진강 이야기를 많이 하였다. 강변의 풍광이며 임진왜란 당시 선조임금이 서울을 버리고 몽진할 때 임진강을 건넜다는 등 강에 얽힌 일화를 심심치 않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임진강이 제일 크고 제일 유명한 강인줄 알았었다.
임진강이 그렇게 이름 있는 강이 아니고 그저 그런 강이라고 알아갈 무렵, 우리의 임진강은 마음 놓고 넘나들 수 없는 금단의 강이 되었다. 그래서 장단사람이 많은 우리 집안에는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 많고 서로 소식을 모르는 이산가족이 많다. 역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소박하게 살아 온 이 분들에게 이제 임진강은 한으로 얼룩진 설음의 강이 되었으며 그리운 전설의 강이 되어 버렸다.
임진강은 북의 두륜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중부를 흐르다가 서해로 흡수되는 길이 254km의 큰 강이다. 땅은 길이 막혀 사람이 왕래할 수 없어도 임진강물은 거침없이 남북을 가로지르며 하류에 이르러 한강과 평화롭게 합류하여 바다에서 하나가 된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의 도도한 물줄기는 강을 사이에 두고 벽을 쌓고 있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남과 북, 우리 강토를 흐르는 수많은 물줄기가 바다에서 하나가 되듯,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민족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작은 물방울이 되고자 50년대 중반, 단독으로 임진강을 헤엄쳐 건넌 지사 한 분을 알고 있다. 보통 사람의 삶을 살았으면 얼마든지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의 지식인이었으나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행복보다 민족의 앞길이었다. 어느 시대나 현실과 불화하면서 신념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그분은 팔십 평생을 험난한 고난 속에서 오직 조국통일을 염원하는 구도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분은 우리 고등학교 은사님의 아우님이시다. 사춘기인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깨워 주셨던 선생님은 아우님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우리는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 아우님이 지향하는 삶의 목표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선 숭고한 대의명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종례시간에 담임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우리 아우가 임진강을 건너 북으로 갔다는구나. 그가 늘 입고 다나는 흰 두루마기 자락이 강물에 떠가는 것을 사람들이 보았다고 하니 틀림없을 거다.”
이 충격적인 이야기에 우리들은 한 순간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가. 그곳은 누구도 넘나들 수 없는 금단의 땅이 아닌가. 그곳을 단신으로 헤엄쳐 건너다니. 그것은 생사를 초월한 용기이며 스스로 사지를 향해 돌진하는 무모한 모험이었다. 무사히 도강을 한다고 해도 지뢰밭을 어떻게 통과할 것이며 경비초소에서 안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에는 요행이라는 것도 있어서 그분은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남으로 내려와 지금까지 통일을 위한 구도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그 같은 모험을 감행한 것일까. 그것은 몇 해 동안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통일독립청년공동체수립안’을 북한 당국에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이 문서에는 구체적이고도 세밀하게 통일방안이 제시되어 있었다. 이 땅이 또다시 전쟁으로 파멸되는 비극을 막으려면 평화적으로 민족이 화합하는 길 밖에 없다는 신념을 작성하고 목숨을 건 용기로 임진강을 건넜던 것이다. 그러나 반세기를 앞서 간 그의 통일방안은 북에서도 남에서도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치부되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양편 모두에게서 간첩으로 오인되어 모진 고난의 삶이 시작되었다.
휴전협정으로 겨우 총성이 멎은 50년대 중반, 그때는 ‘북진통일’, ‘멸공통일’이 중요한 국가적 이념이 되던 시기로 ‘평화통일’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던 삼엄한 시절이었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에서 그분은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문서화한 선구적 통일운동가였던 것이다.
지난 해 출간 된 최두석 시인의 시집 <임진강>은 통일운동가로서 살아 온 그 분의 애국적 생애를 서정성 짙은 문체로 형상화한 장편 서사시이다. 분단시대를 역사의 전면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 온 한 지식인의 모진 수난과 고초, 불굴의 의지, 고독한 절규가 가슴에 사무친다. 또한 시 속에 용해되어 있는 그분의 섬세한 감성과 인간미 넘치는 따뜻한 면모는 분명 서사적인 내용임에도 아름다운 감동을 준다.
그분은 팔십 노구가 된 지금도 통일된 조국, 민족이 싸움 없이 평화롭게 잘 사는 나라, 이를 위해 한 방울의 물이 되겠다고 말한다. 모든 물은 바다를 향해 흐른다. 한 개의 물방울은 작지만 어떤 여건에서도 본질이 변질되지 않고 모이고 모여 바다에서 하나가 되듯이 조국통일에 대한 국민들 개개인의 염원이 모여 근 힘으로 확대 되어 마침내 민족의 숙원인 통일이 이룩되리라고 그분은 믿는다. 그날이 오면 임진강은 우리 근대사의 모든 아픔들을 승화시켜 아름다운 전설의 강으로 도도히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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