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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수필의 여운 / 김진식

수필의 여운 / 김진식

 

 

 

 

하루 종일 수필을 생각하면서도 쓰지 못하는 때가 있다. 산간으로 삶터를 옮긴 뒤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싱그럽고 쾌적한 조건이 오히려 멍청하게 만든다. ‘아마 절()을 삭이지 못해서 그렇겠지하고 기다린다.

그렇다. 때가 있고 삭임이 있고 맛이 있고 여운이 있다. 그 순환의 문을 겨우 열고 두리번거리며 방향을 찾아 생각을 추스르고 있다면 위안이 된다.

하늘엔 구름이 흐르고 숲가지엔 바람이 때를 알린다. 펼쳐지는 것은 자연이고 하는 일은 무위(無爲). 그래서 바라보며 깨치고 거닐면서 쉰다. 노독(路毒)을 풀며 여유를 갖기 위한 새김질이라 할까.

돌아보면 빛과 그림자가 엇갈린다. 보람과 이룸의 빛이 드는가 하면 어느 틈엔가 아픔과 잃음의 그림자가 막아선다. 그래서 옹이가 박히고 마디가 굵다. 삶이 그 속에 농축된다. 상처와 땀방울이 빚은 인생이다.

결절(結節)이 많은 삶은 오히려 문학의 자산이다. 이런 삶을 풀어간다면 순탄한 삶보다 깊고 넉넉할 것이다. 아픔이 사랑이 되고 부끄러움이 자랑이 된 것은 없을까. 그래서 새김질을 하고 있다.

산간의 맑은 기운은 바쁘지 않다. 풀꽃도 고사목도 기다림이 아니라 무위라는 것을 일러준다. 성근 숲가지로 구름이 지나가고 바람이 깃들고 해가 기운다. 멈출 수 없는 순환이 삶을 돌아보게 한다. 자연은 멈추지 않고, 무위는 생육을 보여준다. 고요와 관조가 이를 비춰준다. 맑고 깊다. 그래서 새김질을 하며 추스르고 거르며 맛을 본다. 곰삭지 않고는 깊은 맛을 기대할 수 없다. 인생이든 수필이든 다르겠는가.

금아(琴兒)는 약간 꼬부라진 꽃잎의 파격과 그 여유에서 수필을 찾아내고 있다. 순탄한 인생의 축복이다. 이에 비해 인고의 인생이라면 농축된 옹이를 지나치지 못한다. 각기 다른 삶의 명암과 밀도 때문이다. 꼬부라진 꽃잎의 재치가 맑은 목탁소리라면, 결절의 옹이는 아픔을 삭인 징소리이다. 각기 다른 삶이 빚어내는 명암이 다른 울림이다.

수필의 여운은 문학성의 다른 말이다. 그러므로 여운은 문학성을 보증하는 말이다. 여기에 격()을 더하면 수준을 가늠한다. 그러나 여운이나 격은 쉽게 따라붙는 것이 아니다. 정서가 있고 운치가 있고 기품이 있고 미감이 있어야 한다.

나는 꼬부라진 꽃잎보다 결절의 옹이에 끌린다. 재치와 재능이 따르지 못하거니와 고르지 못한 삶의 굴절 때문이리라.

옹이가 박힌 인생은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다. 풍상을 거치고 연륜이 쌓여야 한다. 그만큼 오래 숙성시킨 맛은 속성(速成)에 비길 수 없다.

나는 내 속에 박혀 있는 옹이를 아낀다. 그래서 삶의 깊은 결절로 치부한다. 그것을 쓰다듬으며 인생을 쓰는 것이 수필이 아닌가 한다.

해가 저문다. 덤불엔 새들이 깃들고 숲은 바람에 잉잉거린다. 절을 삭이는 소리다. 새날이 밝으면 신선한 산간의 삶이 펼쳐질 것이고, 그것을 담기 위하여 결절의 세월을 돌아볼 것이다. 가꾸지 않아도 피고 지는 무위를 보고 들으며 옹이 많은 나무들을 벗하며 어울릴 것이다. 산간의 삶터는 늘 한가하고 조용하다.

자연에 들면 내 삶도 자연이다. 수필이 인생이라면 인생도 수필이다. 산간의 한가함이 운치를 이르며 때를 알려 준다. 철이 오간다. 시작도 끝도 없다. 흐름이다. 고요가 맑고 깊다.

저문 숲길을 거닌다. 멀리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쇠북의 여운이 발을 멈추게 한다.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급하게 재촉한다. 한가함이 오히려 바쁘다. 이를 일러 뮤즈라고 할까. 수필을 빚을 때가 되었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