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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누드 촬영을 가다 / 임수진

누드 촬영을 가다 / 임수진

 

 

 

카메라를 챙겨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슴이 설렌다.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남자모델이 올 수도 있다는 어느 사진작가 선생님의 말씀 때문일까. 평상시라면 무심코 지나쳤을 길옆 돌이나 바람에도 말을 걸고 싶다.

모델은 모두 여섯 명이다. 선이 아름다운 몸을 가진 여자들이다. 내 눈은 남자모델을 찾고 있었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모델로 보이는 남자는 없었다. 선생님 곁으로 가서 살짝 여쭤보니 이런, 오늘 남자모델은 못 왔단다. 순식간에 내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이 되었다.

그녀들은 낙엽송이 하늘을 찌를 듯 길게 뻗은 자연 속에 있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모델, 허리가 가녀린 모델, 얼굴이 예쁜 모델, 그 속에 전체적으로 몸이 둥근 모델도 한 명 끼어 있었다. 그녀의 몸은 젊지 않았다. 빗장뼈도 살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아까는 왜 보지 못했을까. 아마도 내 생각이 남자모델에 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녀의 몸은 신비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큰 가슴과 풍만한 엉덩이는 여체가 생산의 이념으로 상징되던 선사시대의 뿔잔을 든 비너스를 떠올리게 했다.

너럭바위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녀, 여름 산 같다. 나는 겨울 산맥 같은 남자의 근육 대신 여름 산 같은 그녀의 몸을 찍었다. 모델의 아랫배가 카메라 렌즈 속에 출렁인다. 생명을 품어서 길러 본 여자만이 가질 수 있는 몸이다. 나는 단순히 예쁘거나 날씬한 것 이상의 무엇을 잡아내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체를 그릴 때 보이지 않은 부분까지 속속들이 스케치했을 뿐 아니라, 자궁 내 태아의 모습도 정확히 그려냈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퍼스펙티(perspective)라고 했다. 인체의 겉뿐 아니라 그 속의 알맹이를 동시에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진도 예외는 아닌데, 의욕을 가지고 찍은 사진 앞에서 나는 경악했다. 예술이 사라졌다. 누가 봐도 아마추어인 게 읽힌다. 그도 그럴 것이 고백건대 나는 오늘 누드촬영이 처음이다. 욕심만 과했다.

누구나 입문 초기에는 실수를 한다. 살수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하지만 오늘 나는 누드를 감상하고 이해하는 수준과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아동발달의 한 단계인 항문기에 고착되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런 내가 누드촬영을 하겠다고 덤볐으니, 남자모델이 안 나왔으니 망정이지 나왔으면 셔터를 제대로 누르기나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