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 이수안
통영 앞바다에 바람이 분다. 4세기 전 임진왜란의 회오리바람이 몰아치던 바다. 그러나 오늘 갑판 위에는 봄바람이 순하게 분다. 조금 전에 들렀던 청마문학관에서의 느낌이 너무 강했던 것일까.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온몸을 던진 이순신 장군께는 죄송하게도 바람에 대한 상념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고물머리에 길게 매달려 따라오는 하얀 물보라처럼.
옛사람에게 바람은 생명줄을 잡고 있는 절대적 존재다. 들일하는 농부에게 불어오는 한 줄기 실바람은 작은 행복이다. 묘한 것은 남녀 간의 애정인데 이것은 경우에 따라 바람일 수도 사랑일 수도 있으며 사람을 아프게 한다.
청마문학관에서는 유치환 시인의 문학과 더불어 그 생애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곳을 나와 한산섬 제승당으로 향한 뱃길에서도 내 마음을 이리 흔드는 것은 시인의 문학적 발자취나 그 어떤 위대한 작품이 아니다.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에 대한 시인의 사랑 탓이다. 얼마나 절절했으면 이십 년 세월 동안 오천여 통의 연서를 거의 매일 보냈을까. 어떤 날은 두세 통을 보내기도 했다는 걷잡을 수 없는 사랑, 가슴 터질 듯 벅차고 꿈결처럼 달달하지만 금지된 사랑에 애타는 마음.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정신적인 사랑이라 말한다. 미래에도 사람들은 세기의 사랑이라 할 것이고 더러 바람이라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지독한 사랑의 그림자 뒤에서 새카맣게 가슴 태우던 시인의 아내를 생각했다. 두 달도 아니고 이 년도 아니고 부려 이십 년이 아닌가. 바람에게 지배당한 깃발, 저 푸른 해원을 향해 나부끼는 깃발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던 맑고 곧은 푯대의 아픔을 알 것 같았다. 세상이 다 알도록 뜨르르했던 사랑의 깊이만큼 아내의 절망도 컸을 것이다. 애증의 골이 깊어가는 현실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안으로 안으로만 애태우며 지켜보아야 했던 아내. 애절한 사랑을 노래하게 한 시인의 파도가 그 아내에게는 슬픔으로 부딪쳐 가슴을 산산조각내고는 하지 않았을까. 청마 문학관에 전시된 이영도 시인의 사진과 작품집을 보는데 시인의 아내가 느꼈을 서러움이 와락 솟구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여인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했다고 한다. 그것은 대범해서가 아니라 숨을 쉴 수조차 없이 옥죄이는 가슴을 스스로 다독이다 나온 궁여지책이 아니었을까.
지금 거제도의 선산에는 시인의 아내와 청마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던 날까지 아내를 마음고생 시킨 시인은 그곳에서나마 진심으로 속죄하며 위로하였을까. 살아생전 껍데기만 옆에 있던 지아비 곁에서 그 아내는 이제 좀 평화로울까.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애태우던 시인, 그 사랑에 응할 수 없었던 시인의 연인, 가슴에 솥뚜껑만한 멍 자국이 남았을 시인의 아내…. 이제 시인도 떠나고 시인의 연인도 떠나고 시인의 아내고 떠났는데 그때 그 파도는 여전히 푸르고 우리는 시인이 남긴 명시 <깃발>을 노래한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 안 그는
깃발…. 어느 가슴엔들 깃발 한두 개쯤 없으랴, 그리움의 깃발, 열정의 깃발, 누군가를 아프게 하거나 웃게 하는 깃발….
바람이 분다. 세 사람의 기쁨과 눈물을 묵묵히 지켜본 통영 앞바다에 오늘은 봄바람이 순하게 분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이들의 가슴에 매달린 깃발을 조용히 흔들어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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