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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 최영옥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 최영옥

 

 

 

하늘이 이 세상을 낼 때 마지막으로 준 선물은 눈물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남자 화장실벽에는 그런 말이 쓰여 있다 한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압력이 은연중 이 사회에 존재한다.

그런데 요즈음 남편이 수상하다. TV를 보면서 눈시울을 붉힐 때가 종종 있다. 시초는 세시봉 음악회부터였다. ‘허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꿈결처럼 와르르 쏟아지는 화음과 옛 생각에 젖게 하는 가사가 그의 누관을 단단히 건드린 모양이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매사 반듯한 그가 노래에 빠져서 울 줄이야. 그런데 이 남자, 다른 프로에도 절절한 노래가 나오면 또 눈물바람이다. 슬쩍 쳐다보면 고개를 돌리면서도 휴지를 찾는 모습이라니.

라일락 지는 봄밤. 거실에서 남편은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와 한 잔 중이다. 샌님 같은 남편이 저렇게 활달해지는 것은 역시 알코올의 힘이리라. 나도 주방을 들락거리며 홀짝홀짝 거들었다.

손님은 돌아가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옛 추억에 취했는지 포도주에 취했는지, 불콰해진 얼굴로 하숙집 누나 친구를 마음에 두었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시골 촌놈이 광주의 중학교에 들고 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지. , 그때 바이올린 잘 켜시던 이 선생님 말이야. 그 댁에 하숙을 들었거든. 선생님은 시골 우리 집에 하숙을 들고, 나는 광주에. 그렇게 된 거지. 선생님은 여동생이 많았어. 00여고 미녀 삼총사라는 누이도 있었지. 미녀 삼총사는 하숙집에 자주 놀러 왔는데 그 중 하나가 나를 참 귀여워했었어. 원불교 회당에도 데리고 가고 붕어빵도 사주며 살갑게 대해주었지. 우리 집엔 여형제가 없잖아. 천사 같은 그 누나는 내가 지독한 멀리를 해대면 깨끗한 손수건으로 다 닦아주었어. 그 누나, 갸름한 얼굴이 참 고왔지.

한번은 여름방학에 삼총사가 시골 우리 집으로 놀러 온 거야. 모두 바닷가에 갔지. 그런데 예쁜 조가비를 그 누나에게만 많이 주워 주어서 그만 마음을 다 들켜 버린 거야. 딴 누나들이 막 놀려대는데 어찌나 부끄럽던지. 그 누나는 빙그레 웃기만 하더군.

서로 진학을 했었고 세월은 흘렀지. 내가 임관해서 진해에 있을 때, 그 누이도 소령 부인이 되어 진해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 관사로 찾아갔는데 누이는 눈부시게 흰 기저귀를 널고 있더군.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마 해군 장교 송년파티 때였지.

그의 목소리가 조금 젖은 듯이 느껴졌다. 언뜻 앨범에서 본 학창 시절 얼굴이 떠오른다. 눈매가 또렷한 귀여운 남학생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옆의 사내는 귀밑머리가 하얗다. 무심한 세월이 흐른 것이다. 연상의 여인. 게다가 상관의 아내이니 한번도 그 마음을 전하지도 못한 채 속으로만 삭이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 자기는 연상의 여인이 이상형이니 뭐니 흰소리를 하더니만.

어느새 고른 숨소리를 내며 남편은 잠이 들었지만, 그의 얘기가 감상을 불러와 쉬이 잠들 것 같지 않았다. 이문세의 옛사랑을 나직이 읊조린다.

이제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맘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 대로/내버려 두듯이가슴에, 눈가에 습기가 차오르게 하는 노래. 그래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마음에 두는 거다.

며칠 전 만났던 친구 수녀님 얘기를 떠올린다. 젊은 시절, 같은 성당 교우였던 수사님이 지금도 내 소식을 궁금해 하더라는 얘기. 그 당시 그분은 교사였고 함께 레지오 활동을 했었다. 한 번은 내가 사경을 헤매며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미 난 약혼자가 있어서였을까. 직접 병실에 들어오지는 않고 백합 꽃다발만 두고 갔다고 전해 들었다. 그런데 종종 나의 안부를 물어 온다는 얘기에 잠시 애잔한 기분이 들었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그리움 한 자락쯤 가슴에 담아놓지 못한 이가 오히려 가여운 것은 아닐까. 봄밤에 마시는 와인 같은 순수한 얫사랑의 추억. 본사 짝사랑이란 제 혼자 수줍게 붉었다가 송이 채 떨어져 땅에서도 시름시름 피어나는 붉디붉은 동백꽃 같은 것을.

잠든 남편의 머리카락을 쓸어본다. 희미한 주름들이 이마에 드러났다. 꿈속에서 그녀라도 만나는 걸까. 나이가 들수록 서로의 상처와 허물, 추억까지도 나눈 상대가 있다는 것이 큰 행복임을 깨닫는다.

창밖 빗소리는 더 거세지고, 그의 옛사랑도 나의 옛사랑도 이 밤 라일락 꽃잎 되어 속절없이 지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