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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산길에서 / 이영옥

산길에서 / 이영옥

 

 

 

늦은 밤 원적산 길을 달린다.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숲에 밤꽃 향기가 가득하다. 내 비밀을 알고 있는 친구 같은 길,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늘 새로움을 보여주던 길, 눈물과 한숨을 뿌렸어도 저 언덕 너머엔 봄이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던 길. 지난 가을 다른 근무지로 발령이 났을 때 칠 년 이상 한결같이 다니던 이 길과 멀어지는 것이 무엇보다 아쉬웠다.

처음 이 길을 만났을 때는 평범한 산길이었다. 이따금 오고가며 이용하던 길이 나에게 다가온 것은 새로 일터를 발령 받으면서 출퇴근길이 되었기 때문이다. 편안해서 좋았고, 도심 안에 있어서 좋았고 출퇴근을 하는 길이라서 더 좋았다.

출발과 도착의 중간지점인 산곡동에서 가좌동으로 넘어가는 이 도로는 아마 한때는 산이었던 것 같다. 길옆으로 완만하게 내려오던 산언저리의 잘려나간 모습이 그렇고 철따라 다투어 피고 지는 야생화를 보면 그렇다. 비스듬히 휘어진 모양이 사람을 끌어안는 듯 편안하다. 승용차로 달리면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는 짧은 거리지만 차가 밀리는 날은 이삼십 분이 족히 걸리기도 한다. 이런 길로 출퇴근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이 길에 들어서면 소소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소중하게 생각되고 나도 모르게 감성이 부풀어 올랐다. 도심 속 숲에서 느껴지는 피톤치드 향이 일상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청량제여서 기분 좋은 날에는 못하는 노래도 불러 보곤 했다. 이곳을 지날 때면 나는 일부러 천천히 운전을 하고 보행인이 없는 한밤중에라도 신호를 아주 잘 지켰다. 무심코 하늘을 보고 바쁜 일상의 쉼표를 찍게 해주던 길,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 오고갈 때마다 창문부터 내렸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아름다운 풍광에 한껏 행복했던 날들이었지만 이 길이 내게 그리 애틋한 것은 어려울 때 함께한 친구 같아서일 것이다. 나를 짓누르는 현실에 마구 소리치며 울부짖고 싶었던 날들. 오고 갈 때 줄곧 따라다녔던 암담했던 기억들이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시부모님이 병환으로 돌아가시면서 빚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었다. 게다가 아이들의 교육비에 허리가 휘는 참이었다. 몸이 좋지 않았던 남편마저 병원에서 주변정리를 하고 입원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도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누구에게 말 할 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퇴근이 늦어 깊은 밤 이곳을 지날 때면 종일 참았던 답답함에 고함을 질렀다. 엄마! 어떻게 해야 돼? 대답이 없는 엄마를 불러대면 나도 모르게 와락 굵은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 꾹꾹 눌렀던 이야기를 대숲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처럼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그 길 위에 토해냈다.

멀미가 나는 듯 어지럽던 시간들이 더디게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계절이 바뀌고 남편의 병도 오진으로 판명되어 엉켜진 실타래가 한 올 한 올 풀리기 시작했다.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때서야 보이지 않던 산길이 차차 눈에 들어왔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나무들은 저마다 자기 색깔로 타오르며 아름다운 색을 마음껏 풀어 놓고, 하늘만 받들던 은행잎이 땅으로 내려앉아 황금카펫을 펼쳐놓았다. 차가 달릴 때마다 나비 떼처럼 일제히 올라왔다 내려앉는 마지막 군무가 찬란하였다.

향기 가득한 산길에 빨간 오크통 모양의 불빛이 줄지어 서있다. 부드럽게 휘어졌던 길도 구불구불하다. 무슨 공사를 하는 걸까. 바라건대 너무 달라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게 아픔과 추억이 묻어있는 길이듯이 다른 누구에게도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봄을 기다릴 수 있는 치유의 길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