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케의 텃밭 / 박세경
암만 생각해도 괘씸했다. 미국에서 살던 아들네를 불러들여 함께 산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그간 아들은 물론, 결혼 전에 시향(市響)에서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던 며느리도 남매 키우며 말없이 큰살림을 잘 감당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밥상에서 사단이라면 사단이 났다. 아들이, 이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과외나 특기 지도를 받아야 되는 게 현실이란 말로 운을 뗐다. 요는 제 처도 전공인 바이올린 개인 지도를 해야 되겠으니 일주에 3,4일 정도 자유 시간을 달라는 말이었다. 눈치로 보아 며느리는 지도할 아이 몇몇도 은밀히 선정 해 약속이 된 것 같았다.
그녀는 며느리가 밖에 나가 일하는 것을 장려하지는 않지만 굳이 반대할 생각도 없다. 다만 몇 년을 하루 같이 머리를 맞대고 살면서도 시어미한테는 말 한 마디 않다가 베갯머리송사로 아들을 부추긴 것이 고까울 뿐이다.
그 간에 저와 내가 쌓은 정이 이 정도밖에 안 되었단 말인가. 아직은 제 어미 손길이 필요한 손자 손녀나 식구들 저녁 취사 문제도 있는데. 그리고 보니 모두가 시집살이에서 벗어나고 싶은 제 욕심에서 나온 핑계란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아들이 출근하고 아이들은 차를 태워 유치원엘 보낸 후, 그녀는 며느리에게 말했다.
“차 마시면서 아침에 아범이 하던 이야기 마무리를 짓자.”
며느리는 말없이 차를 한 잔만 타 가지고 와 시어머니 앞에 놓고 마주 앉더니 거두절미하고 결론을 말했다.
“어머님 아버님이 반대하시면 이번에는 포기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제 일을 영영 그만두고 싶지는 않아요.”
태도는 공손했지만 제 의사를 분명히 한 며느리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기척이 없다.
그녀는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을 풀길이 없어 안방으로 거실로 서성이며 좌불안석, 누구에겐가 마음껏 하소연이라도 해 보고 싶었다. 딸이 넷이나 되지만 초록은 동색이라, 모두 제 올케 편을 들어 오히려 어미의 화를 돋울 게 번하니 소용이 없다. 그저 속상하고 막막했다.
그때 문득 셋째 아들네와 같이 살고 있는 큰올케 생각이 났다. 큰 오라버니가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하니 집에 계실 것이다. 훌쩍 나서서 전철을 타고 큰 오라버니댁에 가 벨을 눌렀다. 몇 번을 눌러도 반응이 없어 경비실로 내여와 난감해 하는 그녀에게 경비원이 말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강둑 근처 밭에 계실 것 같은데 가르쳐 드릴까요?”
내친걸음이다. 경비원의 말을 따라 아파트 뒤쪽으로 난 길로 얼마 가지 않아 강둑에 휠체어를 타고 앉아 있는 큰 오라버니가 보였다.
“오빠-.”
어렸을 때처럼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큰 소리로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아니, 저게 누구여. 우리 작은아가씨 아냐?”
오빠와는 달리 몸집이 작아 고추 포기에 묻혀 보이지도 않던 큰올케가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를 얼싸안았다.
마주 안은 그녀의 눈에서 생각지 않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 집에서 아들 며느리 효도 받으며 같이 살기도 쉽지 않지?”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는 올케로 인해 기분이 풀린 그녀가 말했다.
“언니, 나는 이제야 며느리 일곱을 말없이 거느리는 언니가 참 대단한 여자라는 것을 알았어. 그 동안 얼마나 힘이 들었어?”
“산다는 거 별것 아니라우 저 푸성귀처럼 무던히 참고 정성껏 가꾸면 되는 거지 뭐.”
“….”
“며느리 사위는 물론, 아들딸까지도 큰 상번이고 애물단지지. 그렇지만 더없이 소중한 것들이기도 하잖아?”
그녀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집 온 큰올케가 늙은 시누이를 아가씨로 부를 때면 그녀도 철없는 어린애가 되어 응석조의 반말이 절로 나온다. 그녀는 곧 옛날로 돌아가 오라버니와 올케를 상대로 수다를 떨며 모든 시름을 잊었다. 올케의 텃밭에서 솎은 채소로 만든 점심 반찬들은 상큼쌉쌀한데다가 매콤달콤한 맛까지 섞여 세상살이의 온갖 맛을 다 느끼게 했다.
그녀는 오늘 며느리와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안 했지만 정성껏 심어 인내로 가꾼다는 큰올케의 텃밭을 보면 결심한 바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채소를 한 보따리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은 달 때와는 달리 평온하고 즐겁기까지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며느리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말했다.
“네 재능을 썩히는 것은 나도 아깝다. 그러니 아이들 개인지도 문제는 네 뜻대로 하고, 올 가을에는 살림을 나도록 준비를 해라. 너희들 주려고 사서 전세를 준 집이 그때 만기가 되니 아범에게도 네가 이야기를 하렴.”
뜻밖의 말에 놀라는 며느리를 보며 그녀는 자신의 결정에 스스로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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