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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담북장 / 박영자

담북장 / 박영자

 

 

 

냉동실 문을 열 때마다 은박지에 싼 주먹만한 그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건드리곤 한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쉽게 치우지 못하는 것일까. 한 번 먹을 양밖에 안 남았는데 선뜻 손이 가지 않아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이 무슨 기념품이 될 물건도 아닌데 말이다.

소나기가 세차게 퍼붓던 날 그 형님이 우리 아파트 앞에까지 와서 전화를 했다. 웬일인가 싶어 뛰어 내려 갔을 떄, 우산 속에서 해쓱한 얼굴로 애써 웃으며 담북장이 든 비닐가방을 건네주고는 비가 많이 올 것 같아 서둘러 가야 한다며 황망히 차에 올랐다. 인사도 제대로 할 새 없이 형님을 놓치고는 멀어져 가는 차 뒤에 대고 멍청하게 손을 흔들고 서 있던 내 꼴이 지금 생각해도 쓴웃음만 난다.

그 날 저녁 담북장을 끓이며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나는 언제 누구에게 이런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보았는가 하는 자책 때문이었다. 담북장 뚝배기를 가운데 놓고 우리 내외는 입으로는 맛이 있다고 하면서도 가슴이 저렸다. 밤이 되니 이 집 저 집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담북장을 어떻게 받아야 옳으냐고. 폐암 수술을 한 지 얼마나 됐다고 100리 길도 넘는 시골에서 청주까지 손수 차를 몰고 왔으며 집집이 담북장을 나누어 주고는 바람처럼 사라져 갔기 때문이다.  

짚이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그 형님이 암수술을 받고 서울 병원에 있을 때, 우리 모임에서 번거롭지 않게 한다며 대표 두 사람만 병문안을 갔었기에, 퇴원하여 시골집으로 내려왔을 때 하루 날을 잡아 병문안을 갔었다. 그 형님으로서는 그 빚을 갚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 형님이 우리들에게 베푼 인정과 사랑이 얼마인데 그까짓 쥐꼬리만한 성의를 마음에 두었다니 그 송구스러움이 미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병문안을 갔을 때만해도 희망적으로 보였기에 웬만치 마음을 놓고 올 수 있었는데 그 형님은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그 때 차를 타고 황망히 내 곁을 떠나 듯 우리 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다. 진짜 고독한 사람은 쉽게 외롭다고 투정하지 못한다더니 병마와 외로운 싸움을 하면서도 표 내지 않고 의연하기만 했는데 그 진한 생의 애착을 어떻게 놓고 눈을 감았을까.  

오늘이 바라 그 형님의 첫번째 기일이다. 작년 여름 아들의 생일을 해먹고 돌아오는 길에 그 형님의 부음을 받았으니 그나마 날짜라도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이다. 지금쯤 그 형님이야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지낼 것으로 믿지만, 남편 되시는 분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외국에 나가 있다던 장가 못 들여 애를 태우던 둘째아들은 어찌 되었으며, 이런 저런 안부가 궁금한데 물어볼 데가 없어 막막하다.

생각하면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다.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던 사람도 본인이 가고 나니 모든 것이 단절되고 만다는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마치 강물이 돌 하나 던지면 잠시 파문이 일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표도 없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흘러갔다. 이렇게 한 사람씩 손을 놓다보면 우리 생애도 끝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겁고 답답한 마음에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이 그 형님 기일이 아니냐고 했더니 화들짝 놀란다. 하긴 이 바쁜 세상에 가족이 아니면 누가 기일을 기억하겠는가. K와 나는 그 형님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았지만 정말 할 말이 없어 한참씩 침묵이 이어지곤 하다가 한숨으로 전화를 끊었으니 마음이 더 무겁다.

형님은 치마만 둘렀지 남자였다. 그만치 대범하고 씩씩했으며 억척스러웠다. 여자 교감이 귀하던 시절에 교감까지 지내는가 하면 여고사 회장으로 도내 여교사를 통솔하기도 했고 동창회며 각종 모임에서 늘 선두에 서 있었다. 오토바이를 몰고 쌩쌩 달리지를 않나, 자동차 운전도 일찍부터 하고 다니던 맹렬여성이었다. 멀찍이 그를 바라볼 때는 같은 여자로서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고 혀를 찼었다. 그 가 여군 출신이라는 소문을 듣고 나서야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15, 6년 전 그 형님과 나는 무슨 인연이 닿았던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내 기질과는 딴판인 그가 부담스럽기까지 했는데 그는 특이한 방법으로 다가왔다. 출근하는 그의 오토바이에는 늘 짐이 실려 있었다. 학교급식이 없던 시절이니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거나 매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찌개며 국이며 반찬을 해 가지고 와서는 점심시간마다 불러 모으는 것이다. 신세지는 것이 싫고, 대 선배인데 거꾸로 된 처사이니 편편치 않았다. 그러나 먹는데서 정 난다는 말이 꼭 맞았고 우리는 어느 새 동화되고 말았다.

남의 궂은일에는 발 벗고 앞장서던 그 형님, 학교 친목회장을 도맡아 하며 L선생의 남펴이 비명에 갔을 때도 우리를 진두지휘하여 일을 치러 내는 통 큰 여자였기에 많이 의지하고 살았었는데 이제 옆구리가 허전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여러 남매의 맏이로 자랐다. 어머니가 행상을 나가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으니 어린 동생을 데리고 학교엘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단다. 동생을 동반하고 수업을 받던 때 그것을 묵인해준 담임선생님이 한없이 고맙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었다. 결혼하고도 평탄치 않던 생활은 정말 산전수전 다 겪은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래서 이리 부딪고 저리 깎이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억순이가 되었던 것이다.

퇴직하고도 일거리를 찾아 쉬지도 못하다가 겨우 시골에 정착했는데 백수는 할 것 같던 그 기백도 암이라는 절벽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고단한 생애가 암을 불렀을 것이라고들 수군거렸다.

이제 나는 갚을 길 없는 사랑 빚 때문에 마음이 아리다. 담북장 맛도 전같지 않다. 역겨운 듯한 냄새가 나면서도 구수하고 특이한 맛의 담북장을 참 좋아했었는데 이제는 담북장을 대하면 그 형님이 떠올라 전에 먹던 그 맛이 아니다. 인생의 단맛, 쓴맛, 떫은맛이 다 섞인 듯 느껴지는 오묘한 맛이다.

가끔씩 그 형님과의 추억을 더듬는 일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산다는 게 다 그런 거라고 하지만 모래성을 쌓았다 허문 것처럼 허무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