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매방우 / 공진영
나는 첫아기로 태어났다. 그 때는 아버지가 열여섯, 어머니가 열아홉 되시던 해였다. 그런데 무슨 액운인지, 나는 누운 자락에서부터 병줄이 끊일 새가 없었다고 했다. 십리 밖 돌림병도 남 먼저 끌어와 앓았다. 수두를 치르고 나면 마마를 했고, 마마가 물러갔다 싶으면 홍역을 덮어썼다. 그 중에도 가장 심하게 앓은 것은 홍역인가본데, 그 때는 삽과 괭이를 준비 한 적이 세 번이나 됐다고 들었다. 죽었다 싶어 윗목에 밀쳐두고 이웃 장정 놉하려고 포대기를 들추면 두 볼에 혈색이 돌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젖꼭지를 빠는 시늉을 할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때는 천지가 캄캄해지는 무서움을 느끼며 포대기째 와락 끌어안고 울기도 많이 했노라고, 어머니는 다 큰 내 앞인데도 눈물을 글썽이며 실감나게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
여기저기 점도 할 만큼 했고 의원이란 의원은 안 가본 데가 없었다. 마지막엔 어느 영한 점쟁이한테 물으니, 어머니의 사주팔자엔 첫아들이 없으니 어디 영물을 찾아 대모(代母)를 삼아 주어야 한다는 점괘가 나와, 나를 바위에 팔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 우리 닷마지기 논 어귀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넓은 들판 한가운데 우뚝 솟은 너럭바위라, 누가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위엄과 영험함을 갖춘 우람한 바위였다. 바위의 모습이 큰 농짝처럼 생겼다 해서 동네 사람들은 농바우라고 불렀지만 우리 집 식구들은 어메방우라고 불렀다.
그 바위 위에다 포대기에 싼 핏덩어리를 얹어놓고, 어머니는 손바닥이 헐도록 손을 비비며 대모가 되어 달라고 애걸복걸했던 것이다.
나는 서너 살이 되었을 즈음에야 내겐 어머니 말고도 따로 바위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삼짇날, 단오, 칠석, 동지, 섣달 그믐날 밤이면, 어머니는 음식을 정갈하게 장만해서 겨우 땅발을 뗀 나를 데리고 어메방우를 찾으셨다.
바위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바람기 자는 후미진 곳에 촛불을 밝히셨다. 그리고는 나를 치마폭에 감싼 채 어머니는 두 손을 비비셨다.
"너르나 너른 들판에 사시장철 우뚝 솟은 방우님요. 어찌 영험이 없고 자비심이 없겠나이까. 어리고 철없는 제가 첫 아들을 낳았으나, 사주팔자에 나한테는 첫아들이 없다 하여, 분에 없는 자식이라 방우님께 바치나이다. 아무쪼록 어미의 자정을 베푸시어 이 아이를 맡아주소서. 명줄도 어미 닮고, 강녕도 어미를 닮아 오래오래 살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방우님께 비나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기원에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 분위기가 무서워 나는 어서 집에 가자며 졸라댔던 기억이 어슴푸레 남아 있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유년에 출생한 인근 마을 아기들이 대부분 죽었는데 나만 유독 명을 부지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마에 잡혀갔는지 홍역에 잡혀갔는지 모른다'는 말이 아마 이 무렵에 생겨나지 않았는가 싶다.
그래서 나는 홍진을 치르고 난 이듬해, 그러니 세 살이 되어서야 출생신고를 하게 되었다. 글이 흔한 집이면서도 "불학무식의 소치로……." 하는 사유서를 첨부하는 수모를 겪으며 신고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햇수가 거듭되고 찾아가 비는 날이 잦아질수록 그 바위는 내게 이상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어떤 때 머슴을 따라 닷마지기 논에 갈라치면, 공연히 바위 곁에 가서 기대어보고 싶기도 하고, 쓰다듬어 보게도 되었다. 그리고 바위에 흙이나 새똥이 묻어 있으면 논물을 한 움큼 떠다가 씻어내기도 했다.
가을에 아이들이 참새를 쫓느라고 바위에 올라서서 마구 짓밟으며 "후여, 후우이" 하고 소리치는 것을 보면 괜히 속이 상해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께 이르기도 했고, 모심기나 김매기 때 일꾼들이 바위에 걸터앉아 참을 먹고 있는 것을 보면 울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삼촌과 고모들이 "너는 이 집 아이가 아니다. 늬 어메는 닷마지기 논귀에 있는 농방우다. 방우 밑에서 울고 있는 것을 주워다 키운 거다. 알기나 아나?"
하며 짐짓 애를 달굴 때는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때뿐, 그 바위는 나의 참 어머니까지는 안 되더라도 내게 커다란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느낌이 차츰차츰 어린 가슴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다섯 살 때, 우리 집은 거기서 이십 리나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 가기 전 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어매방우한테로 가셨다. 어린 나의 마음에도 '어메방우는 어쩌노'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던 참이었다. 그 날도 어머니는 백설기를 쪄서 이고 한 손으론 나를 잡아 이끌며 남의 눈을 피해 밤이슬을 밟으셨다.
어머니는 떡보자기를 펴놓기가 바쁘게 합장을 하셨다.
"어매방우님요. 우리는 이사를 가게 됐니더. 마음 같아서야 어메방우님도 모시고 가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니더. 여기 아들도 와 있니더. 이 아이가 조선천지 어디를 가더라도 모자의 천륜을 끊지 마시고 춘하추동 사시절 밤이나 낮이나 항상 굽어 살피시어, 삼천갑자 동방삭이처럼 오래오래 살고 수복강녕을 함께 누리도록 해 주이소. 그리고 부디부디 편안히 계시소"
나도 곁에 꿇어앉아 있다가 떠날 때는 큰절을 올렸다. 이사를 떠난 후로는 60년이 넘도록 어찌된 일인지 나는 한 번도 어메방우를 찾은 적이 없었다. 이것도 불효라면 불효라 할까.
그런데 연전에 그 곳에 갈 일이 생겨서 어메방우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 바위는 옛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쩐 일일까? 옛날엔 그렇게도 크고 우람했던 풍모가 너무도 볼품이 없이 왜소해져 있었다. 내게 한 길이 훨씬 넘던 높이는 겨드랑이에도 미치지 못하고, 넓이도 깔 방석 두엇 닢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치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 여위고 쪼그라들어 방 한쪽 구석에 누워 계시던 그 모습이라고나 할까.
'아, 바위도 늙는구나.'
우글쭈글한 바위 위에 어머니의 얼굴이 포개져 나타났다. 긴긴 세월 동안 이 어메방우는 어머니의 간절한 기원을 잊지 않고 자정과 염려로 나를 지켜 주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어메방우에 기대듯 안기듯 하여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서 있었다. 육신에 전해지는 돌의 촉감은 싸늘했지만 가슴으로 느껴지는 그것은 따스하고 훈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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