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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진눈깨비 / 설성제

진눈깨비 / 설성제


 

 

신년 초, 하늘은 아직 잿빛이다. 여차하면 눈이 평펑 내릴 것도 같고 어쩌면 찬비가 내릴 것도 같다. 눈은 눈대로 비는 비대로 제 존재의 의미가 분명하리라. 방과 후 강사 후보자들이 면접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다. 마침 먼 하늘 문을 열고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눈이 되지 못한, 그렇다고 비도 아닌 진눈깨비들의 표정이 모호하다.

순서를 기다리는 중 어떤 이는 아예 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얼굴을 도무지 보여주지 않는다.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모습 치고는 정물처럼 서 있어 참으로 답답하게 보인다. 게다가 경쟁자들끼리 대화를 나눈다는 것도 아직은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지 함묵으로 일관한다. 스무 개가 훨씬 넘는 강좌에다 한 강좌에 서너 사람이 서류 신청을 하여 비좁은 공간은 마치 수용소를 방불케 한다.

새해가 시작되면 강사들은 이곳저곳으로 면접을 보러 다닌다. 한 학교에서 한 강좌에 해당하는 수강생의 숫자가 정해져 있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최대 보수 또한 정해져 있다. 놀기 삼아 일을 한다든지 보수와 상관없이 일을 하지 않는 이상 한 군데서 나오는 보수로 족할 수가 없다. 게다가 한 학교에 일주일 중 적어도 두 번은 출근을 해야 하기에 두 학교 이상 수업을 하기도 힘들다.

분기가 시작될 때마다 수업 계획안, 출석부 작성, () 분기에 대한 통신표 작성, 교실 사용 점검 내용을 제출해야 한다. 학기 별로 공개 수업을 하고 일 년에 한 번 하는 작품 전시회도 만만치 않다. 평소에 수업을 대충해서 넘기면 좋은 작품이나 결과물을 얻어내기 힘들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충실하게 마음을 들여 하면 된다.

힘든 것은 교실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해가 바뀔 때마다 학생 수는 줄어드는데도 부족한 교실 탓에 이 교실 저 교실로 떠돌아다녀야 할 경우도 있다. 또 다른 방과 후 수업과 시간이 겹치지 않도록 시간표를 설정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다. 방과 후 수업을 하기로 한 교실에서 정규수업이 채 끝나지 않아 복도에서 가방을 들고 기다리는 시간은 돈을 꾸러 온 것인 양 참으로 서럽다. 수업을 들으러 온 학생들이 복도에서 기다리다 장난을 치거나 시끄럽게 굴면 마치 자식이 주인에게 밉보일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일일이 단속을 한다.

교실에 들어가면 게시판이나 사물함에 있는 물건에 손이라도 대서 흠집을 내거나 아예 물품을 상하게 할까봐 노심초사다. 그 교실 담임 선생님이 행정직인 일로 책상 앉아있으면 이이들 가르치는 것도 혼내는 것도 심지어 칭찬하는 것도 괜히 눈치가 보인다. 괜히 얼굴이 붉어지면서 목소리에도 힘을 주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대한 비애일까.

수업이 끝나면 교실을 그냥 빠져나올 수 없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고 피곤해도 뒷정리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 청소기를 돌리고 칠판과 책상을 닦고 창문 단속까지 마무리해야 일이 끝안다. 버젓이 책상에 앉아있는 교사의 눈에 거슬릴까봐 청소기 돌아가는 소리에도 마음이 쓰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책상 줄이 삐뚜름할까봐 맞추고 또 맞춘다.

보수를 바라든, 재능 기부를 하든 사명감이 없으면 과연 누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강좌 종류가 많은데 영어와 컴퓨터 쪽은 학생들이 몰리다 보니 나머지 강좌에 수강생이 그리 많지는 않다. 성적과도 별 상관없는 예능 쪽에는 학생 수가 터무니없이 적어 강좌가 어떻게 계속 이어지는지 같은 강사 입장으로서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이렇게 표류하는 이국인처럼 이 학교 저 학교를 떠돌며 일 년이 자나면 또다시 학교를 찾아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본다. 마치 어부가 어구를 손질하고 미끼를 준비한 후 닻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하듯이, 애써 작성한 서류를 받아놓고도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하지 않는 경우는 무엇인지 궁금해질 때도 있다. 일 년에 한 번 강사 채용이 기존 강사들에게 경각심을 주기도 하지만 모든 서류를 새롭게 마련하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게다가 괜한 경쟁심을 불러일으켜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같은 처지인데도 서로 날을 세우고 있는 모습이 처량하기까지 하다. 이 학교에서 만난 경쟁자가 저 학교 대기실에서도 보게 될 때 최소 2년도 안정을 주지 못하는 시스템에 부아가 치밀 때도 있다.

이것이 학교뿐이랴. 회사에도 정규직 대신 비정구직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더 증가한다. 일 년에 한 번씩 계약함으로 퇴직금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일로 연계되지 않으면 시급은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대기실에서 면접을 기다리는 강사들의 마음은 초조하다. 미리 나눠준 면접 내용을 열심히 메모하는 이도 있고, 그 종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도 있다. 먼저 면접 보고 온 이들 중 나머지 지친 사람들을 향해 너스레를 떠는 이도 있지만 황당한 질문에 입도 벙긋 못하고 돌아온 이도 있으니 면접실에 들어가 봐야 알 일이다.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아무리 오랜 시간, 화려한 경력으로 자리를 잘 지켜왔다고 해서 방심할 상황이 아니다. 새롭게 지원하는 강사의 이력과 교수 방법과 노하우에 따라 가차 없이 잘려나갈 수 있는 게 방과 후 교사다.

면접이 끝나면 또 어디로 가서 자기 자신을 단장해야 하는 것일까. 창밖에 진눈깨비가 날린다. 눈도 되지 못한, 비도 되지 못한 그 서러움에 겨워 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