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의자 / 정경해
참 기이한 일이다. 북천변을 걸으며 풍경을 렌즈에 담고 있다가 의아한 생각이 든다. 풍경 속에는 하나같이 의자가 들어 있다. 걸음을 멈추고 전에 찍었던 풍경 사진을 살펴보니 컷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긴 나무의자가 놓여 있다. 일부러 의자 있는 곳만을 찍었는가 싶을 정도다. 의자는 띄엄띄엄 놓여 있었고,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매번 풍경인 양 찍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자만을 다시 살펴본다. 그러다 사진 속 의자가 모두 빈 의자라는 사실에 놀란다. 의자에는 다정한 연인의 모습도 있을 것이고, 친구나 가족이 함께 있는 모습도 있을 터인데, 무슨 일일까. 일부러 사람들을 피한 것인가 생각해 보지만 사람 좋아하는 내가 정담을 나누는 사람들을 일부러 피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무의식 중에 빈 의자를 끌어당긴 것일까.
빈 의자에 마음이 가던 때가 있었다. 두 번째 수필집을 묶을 때였다. 그때는 마침 대학원 졸업 논문도 겹쳐 있었다. 다 컸다고 생각한 아이들 셋은 시시때때로 엄마인 나를 필요로 했다. 나는 그들을 일일이 보듬어야 했다. 마음이 바빴다. 거기에다 갱년기 증세까지 생겨나서 몸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글에 매달렸다. 은연중 연로하신 아버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너는 잘 될 거야.”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이 말을 입버릇처럼 해주었다. 학창시절은 물론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고개를 숙이던 때에도 변함이 없었다. 결혼을 하고 아리를 낳아 키우며 삶의 굴곡을 지날 때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너는 잘 될 거야.”라고 보듬어 주셨다. 아버지의 그 한 마디는 나로 하여금 번번이 용기를 갖게 했다.
내가 힘겨울 때마다 위로와 격려가 되어 주던 아버지는 연로하여 기력이 약해지셨다. 간혹 나타나던 치매 증세도 점점 심해졌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 여건 속에서도 당신의 딸이 수필가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셨다. 딸에 대한 기대도 컸다. 아버지를 찾아뵐 때마다 글 잘 쓰고 있느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나의 두 번째 수필집을 기다렸다. 그런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즐겨 찾던 마을회관으로의 나들이도 못하고 하루 종일 방에 누워 지내는 아버지가 언제까지 살아 계실지 알 수 없었다. 더 망설일 수가 없었다. 미수를 목전에 둔 아버지의 생신날에 맞춰 수필집을 묶기로 했다.
써 놓은 글을 한자리에 모으면서 괜스레 뿌듯하고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모아놓은 글을 한 편 씩 차례로 읽어보니 미진한 부분이 많았다. 수필집을 내려고 들떴던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렇다고 중도에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연로하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퇴고를 거듭했다. 그러면서도 내용 못지않게 겉표지에 신경을 썼다. 내가 찍은 사진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몇 장 추려냈다. 주로 꽃과 풍경사진이었다.
수필집의 표지를 꽃으로 할까, 풍경으로 할까 고민이 되었다. 꽃송이로 하고 싶은 마음 한편에 유난히 마음 가는 배경사진이 있었다. 그것은 이곳 상주의 북쪽에 우뚝 선 천봉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으로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눈길을 끄는 것은 정상을 상징하는 표지석 곁에 놓인 긴 나무의자였다.
빛깔 고운 나무 의자는 눈에 확 들어왔다. 안정감 있는 모양과 환하면서도 고즈넉한 분위가가 내 마음을 끌었다. 사진 속이지만 다가가서 앉아 보고 싶었다. 그 의자에 앉으면 안으로만 말리던 마음이 아버지를 찾을 때처럼 저절로 풀릴 것 같았다. 더불어 가슴이 뻥 뚫리고 시원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사진 속 의자는 마음의 위안을 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은 수필집 제목인 ‘까치발 딛고’와는 연관성이 크지 않았다. 결국 편집실에서 내보인 다른 사진으로 표지를 장식했다.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 자리한 그 의자는 나를 보듬었고, 와서 앉아 주기를 기라렸다.
문득문득 빈 의자가 그리울 때가 있다. 기분이 좋을 때보다 슬프거나 우울할 때, 믿었던 사람과의 관계에서 뜻하지 않게 불신감이 생겨 씁쓸할 때도 아버지를 닮은 빈 의자를 떠올린다. 그 의자에 앉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곳에서 위로받고 나 자신을 되돌아보면 마음 추스를 여력이 생길 것 같다.
눈을 들어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다. 흐드러진 벚꽃 사이로 사람들이 보인다. 모두가 바뿐 듯, 설레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걷기에 열중하고 있다. 그들은 곁에 빈 의자가 길게 놓여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이 빈 의자에 몸을 내맡기고 마음을 가다듬었으면 좋으련만. 일상의 분주함을 내려놓고 잠시하고 쉬어갔으면 좋을 텐데.
내 발길이 비어 있는 의자로 향한다.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듯 반기는 빈 의자에 가만히 앉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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