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리 / 정목일
사투리는 그 지방만이 가진 독특한 맛과 개성이 있다. 사투리는 산, 들판, 강이 키운 말의 표정이다. 그 표정 속에 자연의 모습이 담겨 있고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인심이 배어 있다. 보는 사람들마다 속사정을 훤히 알아 얼굴 표정을 보거나 몇 마디 말만 나누면 마음까지 다 알아 버린다. 사투리는 압축 언어이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의 눈짓이요. 말의 고갯짓이다.
사투리는 구수하고 익살스럽다. 점잔을 빼거나 고상하게 보이려는 의식 자체가 없다. 소박하고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세련되지 못한 말씨지만 정감이 있다. 흙내가 묻은 풀꽃 같은 인상을 준다.교양이나 체면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손을 맞잡으며 환히 웃는 고향 친구처럼 다정스럽다.
경상도 사투리는 어딘지 무뚝뚝한 구석이 있으나, 속이 깊고 믿음직스러운 데가 있다. 되도록 말을 줄이고 발음도 간편하게 한다. 목소리가 우렁우렁 커서 싸우는 듯이 들리기도 하지만, 잘 들어 보면 의기 상통하여 신바람을 내며 얘기하는 모습이다. 말은 동일하지만 지방마다 억양과 말씨와 맛이 다른 것은 오랫동안 그 고장 자연 환경 속에서 살아오면서 은연중 자연의 모습을 닮아 가기 때문일 것이다. 경상도 사람들이 까다로운 이중 모음이나 받침이 붙은 낱말의 발음을 잘 못하는 것을 자연 환경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자상하지 않고 무뚝뚝한 성미로 말미암아 말을 줄이고 단순화하려는 데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전라도 사투리는 친근하고 나긋나긋하다. 감칠맛이 있고 아기자기하다. 여인의 허리처럼 날렵하고 부드럽다. 전라도 사ㅜ리가 아니면 낼 수 없는 음색과 길게 빼는 여운 속에 친화의 눈웃음이 있다. 말의 맛과 기교를 흥건하게 살려 놓은 것이 전라도 사투리다. 판소리를 들어 보면, 전라도 사투리가 얼마나 운율이 있고 감칠맛과 구수한 맛, 부드럽고 익살스러운 맛을 고루 간직하고 있는가 알 수 있다.
충청도 사투리는 느릿느릿하고 유연하다. 서두르지 않고 단정하다. 말씨에서부터 점잖은 인상을 받는다. 느린 말 속에 여유와 은인자중의 무게가 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품위와 절조가 보인다. 온화하고 말꼬리를 길게 빼는 여운 속에 착함과 평화가 깃들어 있다. 충청도 사투리는 편안하고 따스한 온기를 전해 준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의 기품이 흐른다. 옳다고 여기는 일에 대해서는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을 품고 있다.
사투리는 문화 동질성에서 생겨난 공감 언어이다. 지역 토질에서 피어난 뿌리 깊은 풀들이건만, 어느 새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가는 느낌이다. 저녁노을을 받으며 마지막 남은 황톳길을 따라 사라져 가는 사투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잘 익은 젓갈의 인정과 지방색이 녹아 있는 사투리를 접할 수 없다는 것이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다. 내가 동창회에 나가는 이유는 구수하고 정겨운 사투리를 맛보기 위해서이다. 거리낌없이 어릴 적 사투리로 말하며 정서적 공감을 느끼고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그럴 때 웃통을 벗어젖히고 숲을 나누는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사투리가 그 지방만이 간직한 고유 언어로서 지방의 넋이 밴 정서와 문화의 뼈와 살임을 생각하면, 그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어선 안 될 것 같다. 앞으로는 사투리 대회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허전하기만 하다. 어느 새 소중한 문화유산을 상실해 가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보리밥 같은, 쑥부쟁이 같은 사투리가 그립기만 한데, 청소년들은 이것을 알지 못한다. 표준어를 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나, 사투리를 천시하거나 홀대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고향의 자연, 부모와 벗들의 표정이 담긴 정다운 사투리를 좋아한다. 사투리는 나를 낳고 기른 야생의 싱그러운 풀밭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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