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迷鳥) / 조이섭
예쁜 새 한 마리가 텔레비젼 화면에 나타났다. 녹황색 날개 무늬에 눈 앞뒤로 검은 실선이 그어진 노랑배솔새였다. 동남아시아에서 겨울을 지내다 여름에 중국 남부로 이동해 번식하는 철새인데, 수백 킬로미터 벗어난 우리나라에서 관측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렇게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출현하는 새들은 미조迷鳥라고 한다. 손안에 쥐어질 정도로 작은 노랑배솔새는 무슨 사연이 있어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여기까지 왔을까? 그냥 어리버리하던 중에 무리를 놓쳐버린 것일까. 아니면, 제 의지로 새로운 길을 찾아 과감하게 떨쳐 나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에게도 길을 헤맨 시간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현장실습을 나간 곳이 첫 직장이 되었다. 폴리에스터 실을 가공하는 공장이었다. 블록으로 벽을 가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일자 집의 방 한 칸을 얻어 기숙사 삼아 동료들과 엉켜 살았다. 하루 열 시간 근무에 휴무라고는 한 달에 이틀뿐이었다. 간간이 야간 근무도 했다.
밤샘근무를 할 때 창밖으로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리에 섞여 이리 날면 이리로, 저리 가면 저리로 방황하는 생활을 계속할 것 같은 불안감이 일었다.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고 싶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었다. 대학에 가고 싶었으나 형편이 되지 않았다. 해마다 입시 철만 되면 몸살을 앓았다. 어떻게든 몸부림이라도 쳐 보려고 전문대학 분석화학과에 입학했다.
그해에 방위소집이 되어 밤에는 백 리나 떨어진 고향 파출소에서 야간 경비를 했다. 휴학을 하지 않은 채 낮에는 학교를 다녔다. 공부를 하다 보니, 화학자가 되어 동의보감에 나오는 약재들을 연구해서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나니 모아 둔 학자금이 바닥나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다시 직장을 구하고, 결혼까지 했으나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식지 않았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직장을 그만두고 사 년제 대학에 편입을 했다. 아내와 아이는 고향의 부모님께 맡기고 학사과정을 가까스로 마쳤지만 환경은 나아지지 않았다. 공부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철새의 중간 기착지인 우리나라의 철새집단을 벗어나 텃새가 된 미조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나도 화학자가 되려는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야 했다.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대학 행정직원으로 취직을 했다. 노랑배솔새처럼 목표한 곳으로 가지 못하고 중간 도래지에 머물고 말았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한 새라고 위로했다. 쉽게 산다는 건 무서운 일이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일했다.
사람마다 가야할 길이 하나밖에 없어 평생 미리 정해진 길만 가게 된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무의미할까. 절벽과 절벽 사이에서 장대 하나 쥐고 외줄 타기하는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나만의 길을 찾아 떠나는 고단한 나그네가 아니던가. 나는 길을 가다가 막히면 뚫고, 고비마다 만나는 두 개의 갈림길 중의 하나를 선택하다 보니 어느덧 나만의 길이 되어 있었다.
정년이 되어 삼십여 년 동안 몸 담았던 대학을 떠났다. 퇴직은 갇힌 시간으로부터 자유를 주었다. 이황 선생님이 관직에 물러나 지은 호인 퇴계의 ‘退’를 ‘물러나다가 아닌 새롭게 머물다’라고 해석한 학자도 있다. 나도 여유로운 시간을 밑천 삼아 새롭게 머물 곳을 찾아 뚜벅뚜벅 걸어갈 일만 남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만만치 않겠지만, 이끌어 주는 스승과 좋은 동무들이 많다. 그들이 저만치 가면 종종걸음을 치며 따라가는 한이 있더라도 주저앉지는 않으리라. 쓰러져도 내미는 손을 선뜻 잡지도 않을 작정이다. 내가 가진 모든 열과 성을 다해 비틀거리며 혼자 일어설 것이다.
이번에 찾아온 노랑매솔새가 외로움과 어려움을 이겨내고 텃새 못지않게 우리 곁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면서, 나도 마지막 날이 부끄럽지 않은 미조가 되기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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