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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숲 속의 길 / 정경자

숲 속의 길 / 정경자

 

 

 

긴 장마가 잠시 숨고르기를 하던 날이었다. 드라이브나 하자는 옆집 정아엄마의 말에 의견 일치를 본 두 가족은 차 한대에 몰아서 타고 길을 나섰다. 계획도 목적도 없이 무작정 떠나는 여행은 일행들을 가벼운 흥분으로 들뜨게 했다.

넓고 편한 국도를 벗어나 우측 농로로 차머리를 돌렸다. 익숙한 탄탄대로를 버리고 낯선 길을 선택한 까닭은 결국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내지는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노폭이 좁은 길가에 나지막한 시골집들이 정겹게 어깨를 맞대고 수런거리는 듯했다. 담장너머 능소화가 기웃대었고 낮은 울타리에는 오동통하고 순하게 생긴 강아지가 졸고 있었다. 장마철이라 경운기도 한가로이 쉬는 모양이었다. 수련과 왜개연, 개구리밥의 동글동글한 잎사귀사이로 소금쟁이가 동그라미를 그리는 연못은 한가로웠다. 물 만난 고기마냥 죽마고우 두 남자의 왁자지껄한 대화는 시골의 고즈넉함을 깨고도 모자라 개구리도 놀라 도망가게 했다.

"옛날엔 물 반, 고기 반이더라 카이."

"다른 연못이라 카이, 고기가 어딨노?"

티격태격하던 두 강태공의 낚시 본능은 그렇게 잠재우고 아쉽게 그 자릴 떠나야만 했다. 낚싯대 하나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선 까닭이다.

산비둘기 울음이 아련하던 농가도, 인적도 뜸해지더니 좁은 농로도 끝이 났다. 연이어 산길이 숲 속으로 펼쳐졌다. 울퉁불퉁한 꼬부랑길엔 신작로와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풀숲을 헤집던 유년시절의 낭만도 언뜻언뜻 되살아나는 듯했다. 방금 장맛비에 씻긴 숲의 녹음은 정갈하다 못해 청아했다. 채도가 제각각인 초록 이파리도 도시의 네온사인으로 지친 눈을 살살 헹궈주는 듯했다.

"우아! 산딸기 좀 봐."

산중턱 길 양쪽으로 산딸기 덩굴들이 지천으로 뻗어 빨간 얼굴을 디밀고 있었다. 애어른 할 것 없이 차에서 내린 일행들은 산딸기를 따는데 여념이 없었다. 풀빛이 선명한 만큼 붉은 색은 더 매혹적이었다. 아이들에겐 그림책이나 식물도감에서만 보던 신기한 열매였을 것이다. 동네 언니들 치맛자락 붙잡고 뒷동산에 올랐던 어린 시절, 손끝과 입술이 시뻘겋게 따먹던 추억이 있었는데. 숲 속의 이방인 때문에 꿩들도 놀라서 푸드득거리며 달아났다.

인간이 태초에 사냥과 열매채집으로 연명하고 살았던 유전자는 수백만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것 같았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딸기 따는 재미에 석양이 넘어가는 줄도 몰랐다. 산속에 성급한 어둠이 내리자 그제야 갈 길을 서둘렀다.

말이 길이지, 토사가 흘러내린 자갈밭 가운데를 잡초가 이랑을 만든 꼴이었다. 비에 일부가 씻겨나간 비탈길이라 차는 크게 요동을 쳤다. 사람의 발길이 쉬이 닿을 수 없는 험한 산세 탓에 숲은 그나마 원시림 형태로 유지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하늘로 일제히 뻗은 나무의 위용이 장엄하다 못해 경이롭다.

팻말이 없어 산의 이름도, 깊이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우듬지 사이로 운무가 깔리는 풍광을 보아 웅장한 산세를 짐작만 할 뿐이었다.

무심히 떠나는 길의 목적지도 결국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 사람도 태어난 흙으로 돌아가고 원점이 곧 도착지인 것처럼 시작과 끝은 결국 만나게 되리라.

방향을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어둑어둑한 숲은 마치 미로 같았다. 빨리 벗어나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한참을 달렸건만 지나가는 차도, 민가도, 그 흔해빠진 전봇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잃을까봐 두려운 나머지 차안은 일순간 서늘해졌다. 정아아빠가 연신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통화권이탈'이라고 중얼거려서 얼굴들은 끝내 하얗게 질렸다.

말은 삼켰지만 나 역시 차타이어를 교체한 지 몇 해가 지났는지를 짚어보며 조마조마했다. 하필이면 그것이 그때 궁금해질 건 또 뭔가? 자갈길에서 타어이가 펑크라도 난다면 일행은 꼼짝없이 산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 기도하는 심정으로 불길한 입방정조차도 경계해야만 했다.

갈림길이었다. 남편은 지름길이라 여긴 우측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습관이다. 오른손잡이들이 오른쪽 길을 선택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마땅히 지금길이라 여겼던 좁은 길은 결국 계곡 쪽으로 빠지면서 끊어지고 말았다. 아이 키만큼 자란 개망초 군락이 이제는 자기네 영토라는 듯 길을 막고 시위를 했다.

우회전을 했을 땐 모두들 무언의 동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차의 뒷바퀴가 헛돌고 발이 푹푹 빠지면서 일행들이 차의 후미를 온몸으로 밀었을 때는 한번쯤 반대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은 사람인들 일행을 곤경에 빠뜨리고 싶었겠는가? 말해본들 서로 미안할 것이 뻔하다.

천신만고 끝에 빠져나온 막다른 길 때문에 일행들은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서늘한 산의 기온과 두터운 어둠 탓에 소름이 돋았다. 차창너머로 낯선 일행을 향해 호기심어린 손을 내미는 나무들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산림욕을 하겠다고 열어놓았던 창문도 모두 닫아버렸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훤히 꿰뚫은 길이 된다. 미궁 속을 헤매면서도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는 이는 없었다. 전진을 지향하는 인간이 왔던 길로 돌아가는 데는 그만한 크기의 자존심도 함께 꺾어야 함을 철없는 아이들도 알고 있을까?

캄캄한 길옆의 풍경은 있으나마나였다. 일행들의 눈엔 이미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는 길이었다면 숲길을 거닐거나 계곡에 발 담그는 한유도 부렸을 텐데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혹시 농막이라도 나올까 싶어 모두들 앞 유리창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숲을 꼭 벗어나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차는 멈추는 일없이 달렸다. 밤새 산을 휘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체념하고 산속에서 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달리자 그제야 희미한 불빛 하나가 나타났다. 그것 때문에 차 안의 분위기는 180도로 바뀌었다. 미아 신세는 겨우 면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인 모양이었다.

"소변 보고 싶어요."

"배고프다. 뭐 좀 먹고 가자."

긴장이 풀린 일행들은 갑자기 주문이 많아지면서 다시 재잘대기 시작했다.

불빛은 자양 댐 입구의 가로등이었다.

산을 빠져나온 그 곳은 보현산 정상에도 한참 못 미치는 겨우 산자락의 옆길이었다. 첩첩산중에서 두 시간여를 헤맨 것을 생각하면 형편없이 낮은 고도였고 무심히 지나쳤던 길목이라 도리어 허탈했다. 정아아빠의 말 한마디는 일행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전에 송이버섯 따다가 실종된 사람 구하려고 출동했던 길이네. 알았던 길인데 거꾸로 오니까 도 모르겠네. 허허, 그거 참!"

길이나 삶에서 그 경로를 알고 모름의 차이에서 오는 두려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가다보면 복병도 만나고 늪에 빠지기도 한다. 그것을 잘 극복하면 자신감이 생기고 단박에 높은 곳으로 뛰어오르려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 인생의 행로다. 모름지기 사람은 아는 길보단 모르는 길에서 더 경계하겠지만, 위태로운 길도 철저히 대비하면 극복할 수 있다. 잘 아는 평탄한 길에서 주의하지 않고 자만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까?

순수의 자연으로 돌아가기엔 인간은 물질문명에 너무나 깊이 젖어버렸다. 뛰어난 지능으로 지구 밖의 우주까지도 넘보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캄캄한 숲 속에선 불안에 떠는 한 마리의 노루와 무엇이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