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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북 / 신영기

/ 신영기

 

 

 

내 고향 칠월은 논매기 철이었다. 머슴이 두 명이나 있는 부잣집 논매기가 끝나는 날은 마을에 잔치가 벌어졌다. 상쇠의 꽹과리 신호를 따라 북과 장구와 징이 어울리는 농악놀이가 펼쳐졌고, 누렁소 등에 탄 상머슴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넓은 마당이 농악놀이 무대였다. 누르스름한 농주가 담긴 커다란 옹기를 가운데 두고, 날 세운 호미를 허리춤에 찬 일꾼들이 휘적휘적 춤을 추었다. 풍물 소리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신호다. 구경 나온 어른들에게는 시큼털털한 농주 한두 사발이 돌아갔고 아이들에겐 안주로 장만한 장떡 한두 조각이 쥐어졌다. 농주가 피워낸 열꽃이 얼굴에 벌겋게 피어오른 어른들이 흥이나니, 장떡 한 조각씩 들고 있는 아이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아련하게 동심의 추억 속에 잠들어 있던 북소리를 깨우려고 사물놀이 모임에서 고수를 맡았다. 들을수록 흥이 나고 용기가 솟아나는 북을 마음껏 두드려볼 기회를 얻은 것이다. 사물놀이가 펼쳐지는 무대는 구름이 피어오르고 번개가 친다. 바람이 불고 비 오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네 가지 사물이 내는 소리를 운, , , 뢰라 하여, 북은 구름, 꽹과리는 천둥, 징은 바람, 장구는 비에 비유하는 것도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진 소리가 이루는 조화 때문이다.

가슴에 북을 안고 두드리면 옛 고향의 정취가 물씬 풍겨난다. 마을 앞에서, 넓적한 잎새로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던 한 아름이 넘는 오동나무를 베어 깎고, 상머슴을 등에 태웠던 누렁소 가죽을 벗겨 씌웠음일까. 북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소잔등의 곡선처럼 부드럽고 쇠머리에 돋아난 뿔처럼 억센 힘이 느껴지는가 하면 어느새 한 맺힌 애절한 소리로 변하기도 한다.

목덜미에 커다랗게 굳은살이 맺히고 등뼈가 휘도록 일을 했지만 새경은 고사하고 고기와 가죽까지 남겨줘야 했던 누렁소의 한 이라도 달려주려는가. 북을 두드리는 고수의 몸놀림도 한풀이 춤을 추는 무녀의 춤사위를 닮아간다. 허이~!사자후를 토해내는 고수의 비상하는 동작에 애잔하게 가슴을 울리던 북 소리가 불끈불끈 용기를 돋아주는 힘의 소리로 승화한다.

북은 두드리거라 보고 듣는 사람들을 하나같이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신명의 소리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 농사일에 지친 일꾼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놀이가 칠월의 농악이었고, 신을 달래고 즐겁게 하여 가정의 안녕을 빌던 놀이가 정월의 농악이었다. 그 신명나는 놀이 한 가운데 빠지지 않고 있었던 북처럼, 길삼을 하신 어머니의 베틀위에는 소리 나지 않는 북도 있었다.

질긴 삼실이 만든 촘촘한 날줄사이를 드나드는 북은 속이 비고 날렵한 유선형이다. 그 북과 일체가 되어 삼베를 짜신 어머니도 속빈 유선형이었던가. 층층시하 대가족이 만든 억센 날줄 앞에 한껏 자신을 낯추고 비우며 사셔야 했다. 속 빈 북처럼 비우고 낮추면서 산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북 실보다도 긴 눈물을 꼭꼭 감추고 사신 어머니의 속내는 눈물 창고였다. 그 창고 속에서 곰삭아 흐르는 눈물이 그처럼 고운 삼베를 짤 수 있게 했었나 보다.

씨줄을 풀어내는 북은 어머니 모습이다. 핏기 없는 얼굴에 마른버짐이 핀 어린 아들에게 밥 한술이라도 더 먹이려고 입속으로 들어갔던 밥까지도 차마 삼키지 못한 어머니, 그렇지만 가난만은 어쩔 수 없었나보다. 배고프다 칭얼대는 아들에게 베틀 위의 잣대를 휘두르며 매섭게 나무라시곤 뒤란으로 돌아가 치마폭에 눈물 훔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충혈 된 눈을 애써 보이지 않으려고 일없이 눈을 부비며 다시 잡던 북은 어머니의 소망이 들어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북이 씨줄을 풀어낼 대마다 어머니 허리에는 한 올 한 올 곱게 짠 삼베가 쌓여갔다. 손바닥에 생긴 물집의 아픔도 잊은 채 날줄 사이로 넣고 빼고를 반복하던 북에서 터득한 지혜가, 억센 날줄이 처진 시집살이와 허기진 삶의 어려움을 견뎌내게 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의미는 한 해 한 해 커 가는 늦둥이 외아들과 한 치 한치 늘어나는 삼베를 보는 것이었을 테니까.

장마비가 흙을 쓸어간 채마밭 고추나무가 비실비실 말라간다. 어깨 토닥여주는 칭찬을 소홀히 한 것은 북주기를 소홀히 한 것이다. 사랑도 받아 봐야 줄 줄 알듯, 칭찬도 들어봐야 잘 할 수가 있는데, 칭찬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아버지 없이 자란 후레자식이란 말을 들을까봐 노심초사하신 어머니는 늘 곧고 바른 아들이기만을 바라셨다. 자연히 칭찬보다는 나무람을 많이 하신 어머니처럼 나 또한 성에 차지 않을 때마다 꾸짖고 나무라기만 했을 뿐, 아이들을 칭찬해 준 적이 없다.

세월이 머리에 이고 가던 후회를 내려놓는다. 텅 빈 칭찬이라는 그릇을 채워보려는 뒤늦은 몸부림이 잠 못 이루는 밤을 만들기도 한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더해갈수록 북이란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북 속에는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게 하는 편안함과, 희망과, 용기와, 힘이 들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힘과 열정이 식어가는 아련한 눈빛처럼, 나이 따라 마음도 여려지는 때문인가. 가끔 칭찬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아니, 누구를 마음껏 칭찬해 주고 싶어질 때, 어머니께 희망을 주며 닳아온 북처럼, 반질반질 윤이 나도록 닳은 북채를 잡은 손에 힘이 솟는다. 둥둥 두둥둥, 뿌리 드러난 고추나무에 북을 주었듯 힘겨운 영혼에 용기와 힘을 북돋아 주려는가. 퍼져 나가는 북소리가 더욱 우렁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