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발 / 곽흥렬

/ 곽흥렬

 

 

 

어디 입맞춤할 데가 없어서 거기에다 대고 키스를 하는가. 언젠가 대중매체를 통해 가난하고 병들어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의 발등에다 입을 맞추는 교황의 모습을 보고서 처음엔 무척이나 의아하게 여겼었다. 어쩌면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이기 위한 다분히 가식적인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몹쓸 생각마저 들었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와야 할 장면에서 어쩐지 느끼하고 어색하다는 인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음은, 무슨 일이든 변하고 바뀜을 거부하는 평소의 가치관이 작동을 했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이것이 비뚤어진 선입견이었음을 깨닫고는 나의 이러한 회의적인 사고관념을 크게 뉘우쳤다. 분명 그 몸가짐은 진실한 낮춤의 꾸밈없는 실천이었을 터인데 말이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고 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처럼, 세상에서 가장 그늘진 곳. 소외 받은 이웃들에 대한 마음 낮춤의 표시로 발에다 대고 입맞춤을 한 것임이 틀림없겠다.

예화에서처럼 흔히들 발은 천시 받는 존재의 대명사처럼 여긴다. 누군가로부터의 대접이 영 시원찮을 때 발가락 사이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고 불평을 표출하는 것만 봐도, 발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아주 형편없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처럼 신체의 맨 밑바닥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히 시선을 내리깔고 대하게 되는 부위가 바로 이 발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세상에 발만큼 충직한 사도使徒가 있을까. 아무리 타고난 효자라도 명을 거스를 때가 있지만 발은 뇌에서 내리는 명령을 거역하는 법이 없다. 이따금 어지러워진 머리를 식히려고 가벼운 산책길에라도 나설라치면 발은 삽살개처럼 제가 먼저 채비를 한다. 그 곳이 진흙구덩이든 가시밭길이든 가리지 않고 뇌의 명령만 내려지면 조건 없이 나선다.

사람이 네 발로 기어 다니다 직립보행을 하게 되면서 발의 부담은 갑절로 늘어났다. 이것은 발의 입장으로 보면 퍽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일생 동안 걸음을 옮겨 디디면서 지탱해야 하는 하중荷重이 대체 얼마일까. 어림짐작으로도 어쩌면 바위를 드는 힘보다 더 클는지 모른다. 그러나 발은 이렇다 하면서 구시렁구시렁 불평을 늘어놓는 법이 없다. 묵묵히 자기 임무를 충직하게 수행할 따름이다.

이러한 발인데도 우리는 평소 발의 고마움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손이야 탈이 나면 조금 불편하긴 해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지만, 발에 문제가 생겼다 하면 곰짝없이 집 안에 틀어박혀야 하는 신세를 면키 어렵다. 이로 보면 발이 담당한 소임이 실로 크고 무거움을 알겠다.

발의 미덕은 그 이타적 속성에 있다. 우리가 흔히 계획한 일이 뜻같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무슨 수단을 강구할 때 '손을 쓴다'고 하고, 계속 이익을 내지 못해 하던 일을 접어야 할 때 '손을 턴다'고 표현한다. 그에 반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동료나 이웃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려는 마음을 낼 때는 '발 벗고 나선다'고 말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손이 개체 지향적이요 이해타산적이라면 발은 공동체 지향적이요 자기희생적이라고 하겠다. 이 점이 손이 결코 따를 수 없는 발의 따뜻한 품성이 아닐까 싶다.

요즈음 들어 발 마사지가 젊은 여인네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인 모양이다. 박대만 당하던 발이 바야흐로 옳은 대접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고나 할까. 게다가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르던 데서 이제는 발톱까지 예술적 표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른바 '네일 아트'란다. 손톱이 여태 예술적 대상까진 승격되지 못한 사이에 발톱이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고 나선 것이다. 이로 보면 발의 주가가 급상승하고 있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세월 따라 귀천貴賤)은 변하고 바뀌어 가는 것이 세상사 정한 이치가 아니던가.

이처럼 소중한 발도 그러나 한번 잘못 들여놓으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발이란 일단 들여놓기는 쉬워도 빠져나오기는 어려운 법, 멋모르고 발을 들여놓았다가 빼도 박도 못해 남모르는 고충을 겪는 경우를 주변에서 심심찮게 본다.

나는 어느 지인知人을 통해 재미 삼아 시작한 증권 투자로 헤어날 수 없는 지경까지 몰려 버린 한 법조인을 알고 있다. 투전놀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 멋모르고 할 때는 뜻밖의 횡재를 하는 수가 있다. 그도 처음 얼마간은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모양이다.

한데 이것이 그만 화근이었다. 은근히 욕심의 독버섯이 고개를 내밀었다. 불로소득의 짜릿한 성취감 속에 도사린 함정을 그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차츰 투자 액수를 늘려갔고 거기서 결국 발목이 잡혀 버렸다. 대박을 노리고 발을 들여놓았다가 결국 쪽박을 차고 만 것이다. 강원랜드 카지노에서 가진 전 재산 이백여 억 원을 몽땅 털어 넣고 빈털터리가 되어 노숙자 신세를 떠도는 한 중년 사내의 사연도 어느 신문은 가십 기사로 전한다.

그 비운의 당사자인들 처음부터 그처럼 엄청난 액수를 쏟아 부었을 것인가. 어찌하다 보니 무엇에 홀린 듯이 빨려 들어가 마침내 헤어날 수 없는 지경까지 몰려 버렸음이 분명하다. 모두가 첫발을 잘못 들여놓아 패가망신에 이른 안타까운 사연들이다.

이런 일로 보건대 사람은 모름지기 아무 데나 함부로 발을 들여놓을 일이 아니다. 첫 단추를 잘못 꿰면 연쇄적으로 뒤틀려지는 법이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옛 속담이 어찌하여 생겨났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우리들 인생살이란 어쩌면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한 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는 발놀림이 아닐까. 평소 천덕꾸러기 같이만 여겨지던 발이 그토록 소중한 존재인 줄을, 세상을 살아가면서 새삼스럽게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