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대속의 나 / 하창수
오후 나절 제법 시원한 바람이 막 뒤섞일 때다. 도심의 가장자리에 호젓이 자리한 설담재(蔎淡齋)를 찾았다. 주인의 손길을 탄, 솟대와 다완 그리고 고재(古材)들로 된 소품들이 초롱초롱한 어린아이 눈망울 같다. 처음 본 듯한 것 같지가 않다. 그녀의 맑은 인상에서 넘쳐나는 기운이 먼저 나에게 인사를 건네자 마치 불이 붙듯 온 방안은 차향과 나무향기로 가득 찼다.
무릇 묵은 간장도 그릇을 바꾸면 새로운 입맛이 나고 전부터 있던 물건도 환경이 바뀌면 느낌과 모습이 달라진다고 했다. 설담재는 우리 생활 주변에서 차츰 사라져가고 없어진 옛 물건들이 환골탈태하는 예술 공간이다. 자그마한 찬장하나만 보아도 과거와 현대의 조화로운 접목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가 없다. 그녀는 솟대 작가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녀가 심미적인 안목이 높고 재주가 많다고들 한다. 이 같은 사실은 틈나는 대로 그녀와 대화를 하면서 이유 있는 사실로 드러난다.
그녀는 삶을 관조하는 것이나 사물을 보는 깊이에서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나무를 사랑하고 아끼는데 있다. 그리고 목물(木物)들의 물성(物性)을 이해하고 감성적으로 잘 다룰 줄 안다. 눈빛에서 손끝으로 이어지는 솜씨는 손에 익숙하고 마음에 응하여,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까지 이른다.
엊그제 차실에서 그녀가 준비한 매화차를 마시노라니 문득 이 고귀한 향이 그녀와 닮았음을 알고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잃을 뻔 했다. 순간 화암(花庵) 유박(柳璞) 선생의 ‘매화가 곧 나요, 내가 곧 매화라.’는 시조가 생각났다.
풍설風雪 산재야山齋夜에 상대相對 일수매一樹梅 라/
웃고 저를 보니 저도 날을 보고 웃는 고나/
두어라 매즉농혜梅則儂兮 농즉매儂則梅 인가하노라//
매화가 곧 그녀요, 그녀가 곧 매화다. 그녀는 꽃을 너무나 좋아한다. 화원에 진열된 화려하고 가득한 꽃보다는 들판에 아무렇게나 핀 민들레를 더 좋아하고 산기슭에 고개 내민 구절초를 더 사랑한다. 온 집안을 야생화 정원으로 꾸며 놓은 것만 보아도 그녀의 야성미를 알 수 있다. 어릴 때는 아예 자연과 더불어 꽃을 사랑하고 항상 손과 머리에는 들꽃이 떠날 줄 몰랐다. 그리고 성장기에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대단히 활발하고 시원시원하며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또한 사교적이며 솔직함이 지나칠 정도였다.
살며시 눈을 뜨고 창가에 놓인 솟대를 완상한다. 복숭아나무 받침대 한 가지위에 앉은 자태는 소박한 촌로가 앉아있는 모습이다. 간결하고 깔밋하다. 군더더기가 없고 함축과 여운이 서려 있다. 목이 길면 겁이 많다고 했는데 필시 겁 많은 여인의 성정이 담긴 듯하다. 즐거우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슬프지만 겉으로는 슬픔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사랑하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보면 볼수록 정이가고 어루만지고 싶어진다.
작품에 앉아있는 새의 수에 따라 솟대를 음미하는 무게도 달라진다. 가느다란 장대위에 한 마리 새는 외로움과 자유를, 양 갈래 나무위의 두 마리의 새는 애절한 사랑의 속삭임을, 세 마리의 새는 화목과 포용을, 여러 마리의 새는 화해와 나눔을 상징한다. S자로 쑤욱 솟은 놈은 당당한 반면 자연스런 선율과 단아한 자태가 압도적이다. 사랑과 자유를 갈망하는 중년여인들이 솟대에 쉽게 빠져들고 그녀를 좋아하는 마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 이제 솟대는 단순히 경계의 상징이나 염원의 도구가 아니다. 그녀에게 솟대는 질박한 삶의 대변자요.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요. 굴욕을 삭히는 효소요. 애절한 사랑이요. 자유를 바라는 희망이자 생명력을 가진 창조물인 것이다. 그 속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함축되어 있고 행장(行狀)이 담겨져 있다. 나아가 구만리 창공을 박차고 날개 짓 하는 대붕(大鵬)의 기상이 숨 쉬고 있다.
홀로 목을 쳐들고 하늘을 응시하는 저 자태를 보라. 간절한 소망을 담은 소녀의 기도하는 모습과도 흡사하며,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해 몸부림치는 과부의 신음과도 같고, 자유를 쟁취하고자 결의에 찬 민주투사 눈빛 같기도 하고, 조용한 모습에선 인욕(人慾)을 끊고 수행하는 비구니승과도 같지 않는가.
집안에 솟대를 들여 놓고 나서부터 서재 분위기가 생기로 가득 찬다. 상생의 기운이랄까. 술기운이 돌면 외로움과 고독을, 힘 빠진 일이 생기면 용기를 주기도 한다. 나의 메신저이기도 하다. 먼 길을 나설 때는 맑은 눈으로 길을 비쳐주는 안내자 같은 주문을 하기도 한다. 내 사물에다 이렇게 뜻을 붙이는 것은 비록 미물이라도 족히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요 며칠 동안 그녀는 꿈과 현실이 잘 맞아 떨어진다고 하며 자기 자신을 신기하게 생각한다. 감사기도의 탓일까? 사근사근한 말씨에 종달새가 하늘을 치솟아 오르듯 몸 사위가 사뿐사뿐 가벼워지는 푼수 띤 행동이 밉지 않다. 솟대는 그녀의 분신이고 솟대를 보는 것은 그녀를 보는 것이다.
오늘 문득, 솟대를 가만히 바라보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 즐겁다. 나는 지금 솟대 속에 있다. 웃고 보니 저도 웃는다. 맑은 미소로 반기는 소박한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른 봄 냉이와 같이 상큼하고 따스한 봄바람이 또 다른 나를 살며시 밀어낸다. 이것이 진아(眞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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