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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재탕 / 정경자

재탕 / 정경자  

 

 

 

황사가 심해서 손님이 없을 줄 알았다. 쇼윈도 너머 주차된 차들이 분첩을 두드린 것처럼 희뿌옇다. 꽁꽁 닫아둔 실내는 바깥 공기와 무관하게 맑고 싱싱하다.

두꺼운 유리문을 힘겹게 밀치고서 머리카락 희끗한, 칠십 줄은 족히 넘은 할머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양손 가득 거머쥔 보따리들을 내려놓고 휜 등허리를 더디게 펴면서 가게 안을 쭉 훑어보았다.

오래전 며느리를 맞이할 때 얌전하게 예단을 쌌을 법한 참꽃색 보자기는 곱디고운 색은 아득하게 바래지고 성질 뾰족한 오가피를 품어, 군데군데 올은 미어지고 가시가 뚫고 나왔다. 부직포 가방은 지난 가을에 거둔 인진쑥, 민들레, 엄나무 등을 꾹꾹 눌러 담아 아가리가 다물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낱 밭두렁 잡초에 불과했던 푸성귀들은 할머니의 부지런한 손끝에서 다듬어지고 말려져서 약초로 환생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큰 아들이 요즘 들어서 많이 피곤해 한다며 일간의 사정을 늘어놓았다. 슬하의 근심을 덜어 주겠다는 일념으로 무거움도 잊고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것들을 이리저리 풀어 헤쳤다. 향촌에서 귀동냥으로 듣고 몸에 좋다는 것을 캐고, 꺾어서 손질해 온 것들과 한약방에서 따로 지어 온 보약을 내보이며 같이 써도 궁합이 맞느냐고 물었다. 약재를 살펴보니 환자를 위한 처방약이 아닌, 보통사람들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보약들이었다. 같이 달려도 된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진하게 달여 달라고 당부를 거듭하는 얼굴에는 일상이 노곤함이 묻어있다. 아들보다도 정작 당신 약이 더 급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만 달싹거리다가 말았다. 노인네의 의지에 비해 나의 설득력은 형편없이 약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염려 마세요. 진하게 해 드릴게요."

연락처를 남기고 문을 나서던 할머니가 멈칫거렸다.

"새댁, 재탕도 되는교?"

"재탕이 되긴 하지만, 별로 진하진 않아요. 보리차 드시듯 하면 모를까. 초탕이 곰탕이면 재탕은 소가 발 담근 물입니더."

알기 쉽게 설명을 해드렸지만 탐탁스럽진 않았다.

옛날 집에서 약탕관을 쓸 때는 처음 달인 약 두어 첩을 모아 재탕하던 시절도 있었다. 요즘도 대형 기계 솥은 120도 이상의 고온에 압력게이지 1600의 고압에서 약의 유효성분을 우려내는 방법을 쓴다. 그러다보니 재탕은 하나마나 한 묽은 농도로 나오기 때문에 권하지 않는 추세다. 손님 입장에서 본다면 똑같은 비용을 들이고도 맹탕을 끓여 먹는 뻔히 손해나는 일이 아닌가.

"재탕도 해서 따로 포장해 주소. 아들 약만 해주려니 며느리한테 미안해서 그라지. 매번 용돈도 받아 쓰는데……."

말끝을 흐리며 가게 문을 나섰다. 아마도 며느리 보약까지 챙길 여유는 없는 허술한 가세였나 보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이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면 좋으련만. 노모의 정성들을 찬찬히 안쳐 놓고 솥뚜껑을 닫았다.

탕약을 찾으러 온 날, 며느리에겐 솔직히 '재탕'이라고 알려주는 게 낫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할머니는 미안해서 그럴 수는 없다고 완강히 손을 내저었다. 오히려 며느리가 묻거든 그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나서야 수공을 치렀다.

걱정이 현실로 나타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삼십대 후반의 여자 손님이 노기등등한 기세로 가게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섰다.

손엔 맑은 보리차 같은 약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어제 판 이 약, 기억나시죠?"

", 어떤 할머니가 해 가신 것 같은데요."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바로 큰 불로 번질 태세여서 분위기는 사뭇 긴박했다.

"젊은 사람이 이렇게 장사 하시면 안 되죠. 노인네를 상대로 사기를 쳐도 유분수지. 이것도 약이라고 팔았어요? 도대체 얼마를 받았어요?"

들고 있던 약봉지를 내던지다시피 탁자위에 놓는 여자의 눈빛에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연신 퍼부어댔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며느리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허탈했다. 아들 약과 더불어 재탕을 내 놓으면서 며느리 것도 따로 맞춘 것이라 말했고, 며느리는 뜻밖의 선물에 감복하여 특별히 두둑한 봉투까지 시어머니께 건넸단다. 그러나 약맛을 보고는 이내 속았음을 알았고, 졸지에 나는 선량한 할머니를 속인 악덕상인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당부했지만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사태는 진정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날 했던 약조는 와르르 무너지고 나도 빠져 나갈 탈출구를 찾기에 급급했다. 기고만장했던 며느리는 자초지종을 다 듣고는 기가 막혔는지 표정이 누그러졌다.

"할마시, 돈이 모자라서 그랬다고 말 한마디만 했더라도……."

며느리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화살은 이미 시어머니를 향하고 있었지만, 기실 전후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식전 댓바람에 남의 가게에 와서 난리부터 친 자신의 좁은 소견을 질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속내를 좀 더 솔직하게 내보였더라면 일이 이렇게 확대되진 않았을 텐데 진실이 호도되어 고부간에 불신의 골만 더 깊어지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살면서 선의의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종종 있다. 진실로 해서 상처 받는 이가 있다면 어쩔 수없이 거짓말을 하거나 휘돌려 말해야 한다. 정직보다 더 설득력 있는 미사여구는 없다. '아가, 내가 가진 돈이 모자라서 네 약은 따로 준비를 못했다만 아범 약을 재탕해 왔으니 물 마신다 생각하고 마셔라. 마음은 항상 네 걱정도 하고 있단다.' 비록 재탕이었지만 이렇게 말하면 섭섭해 할 며느리가 몇이나 될까. 오히려 시어머니 사랑을 마심으로써 마음의 병 하나쯤은 치유될 것도 같다. 말로써 천 냥 빚도 갚는다 했다. 죄질이 나쁜 사형수의 죽음을 면케 하는 것도, 형량을 줄일 수 있는 것도 진정 자기반성의 말로부터 기인한다.

진하게 한번 우려먹은 뒤의 재탕으로 세상을 감동시키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노래도, 영화도 예술작품도 원작으로 우려먹은 재탕은 관객을 감동시키는 데는 역부족인 듯싶다. 처음 관객을 매료시켰던 주요 성분은 쥐어 짜여져 어느덧 함량미달이 된 탓일 테다.

악의적인 목적으로 누굴 속이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나의 가슴 한 편이 묵직한 몽돌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잠시나마 공범이 되어 며느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할머니의 꿍꿍이셈이 성공하기를 바랐던 탓이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미안하다면서 여자의 표정이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할머니가 며느님 자랑을 많이 하셨어요. 웬만하면 모른 척 하세요. 못해주는 시어머님 심정은 오죽했을라고요.'

닳고 닳은 장사치의 처세술로 돌아서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린다. 명치끝을 누르던 몽돌의 무게도 점차 가벼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