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아버지와 감꽃 / 김정미

아버지와 감꽃 / 김정미

      

 

 

반질거리는 옹기항아리가 크기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을 선 친정집 장독, 그 장독대 옆엔 대문을 훌쩍 넘어선 감나무 한그루가 있다. 애초부터 그 감나무는 장독대 옆에 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분께 얻은 붓 자루만한 크기였으므로 마당 어디에 심었든 눈에 띌 만큼 요란한 것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멀었다. 어디에 심었던들 그 나무는 있는 듯 없는 듯 그 존재가 미비했다. 식구 누구도 감나무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늘 조용한 아버지의 존재처럼……. 그렇게 한 해 한 해 세월이 흘렀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 해가 지나도 감나무는 벌쭉하게 키만 컸지 도통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하얗게 꽃을 피우다 스스럼없이 지고 마는 감나무일 뿐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무 둘레가 제법 두툼해지고 꽃이 지고 난 자리에 자두 알 크기의 푸른빛 감이 열리기 시작했다. 미처 주홍으로 물들기도 전에 장독대 주변엔 실없이 덜 여문 감이 툭툭 떨어지곤 했다. 푸른 감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은 큰아이가 유치원을 입학하고 부터인 것 같다. 맥없이 부는 바람에도 분분이 떨어지던 감꽃 자리에 열매가 옹골지게 맺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의 젖니처럼 드문드문 가지에 매달린 감이 주홍색으로 달아올랐을 때 그때서야 감나무의 존재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장독대 옆에 말없이 서서 점점 그 둘레를 키워가는 나무와는 달리 아버지의 어깨는 점점 가벼워져 분분히 떨어지는 흰 감꽃과도 흡사했다. 꽃잎을 버려야 그 자리에 푸른 열매를 맺는 감나무처럼 아버지는 서둘러 우리와 이별을 준비하는 듯 했다.

한 여름의 땡볕을 이겨낸 감나무가 제법 주먹만 한 크기로 익어갈 때 아버지는 한여름 내내 감기로 기침을 달고 지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담배와 커피를 유독 즐겼다. 뜨거운 김을 뿜어내며 찻물을 끓이고, 담배를 물고 햇볕을 끌며 마당을 거닐던 아버지의 등판이 얇아질수록 아버지의 가슴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딸 넷을 올망졸망 키우다 막내까지 결혼시키고 아버지는 가벼워졌다. 스스럼없이 허공을 향해 낙하하는 꽃잎을 닮아가듯 아버지는 꼬박 10개월 항암치료를 반복하는 동안 감꽃처럼 하얀 머리카락도 모두 잃었다.

그해 가을엔 감꽃이 무던히도 곱게 피더니 꽃이 지고 난 자리에 자우 알 크기 만한 열매가 열렸다. 실한 열매 한번 가져보지 못한 채 장독에 그늘만 만들던 감나무를 타박할 때마다 아버지의 변명처럼 감나무는 바람과 기후가 맞아야 감이 잘 열린다는 이야기로 애써 기후 탓으로 얼버무리곤 했다. 반질반질 닦아 놓은 항아리위로 자두 알 크기만 한 감들이 툭툭 떨어질 때 아버지는 더 이상 수술도 할 수 없는 폐암 말기환자가 되었다.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던 아버지는 감나무의 열매가 붉어지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봄 햇살이 황백색의 감꽃을 무성히 피게 하더니 바로 그 자리에 맺은 푸른 열매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질수록 붉게 물들곤 했다. 가을이면 잘 익은 감을 따 껍질을 곱게 벗겨 가을볕에 말려 명절과 아버지의 제사상에 올리곤 했다. 감꽃이 피고 질 때면 "올핸 감이 잘 될 것 같구나"라는 말로 당신의 서툰 삶들을 애써 부듬던 아버지의 조용한 미소, 쓸모없다 타박했던 감나무위로 은빛햇살이 내려앉고 햇살이 머문 시간만큼 엄마의 타박은 점차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해 갔다. 연두빛의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더니 꽃이 진 자리에 아버지의 그리움만큼 감은 붉어졌다.

세상의 빠른 변화속도에도 불구하고 감나무는 서둘러 잎을 틔우거나 서둘러 꽃잎을 버리지 않으려 한다. 또한 서둘러 익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바람이 불고 햇살이 머문 시간만큼 삶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네 딸들이 반듯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했던 아버지, 때론 서둘러 열매를 얻고 싶은 삶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잔잔한 바람에도 꽃잎을 허공에 날리는 감꽃의 자유로움을 아버지는 내게 전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밤마다 장독대위로 툭툭 감 떨어지는 소리에 어머니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했다. 미처 익지 못하고 떨어지는 풋감은 장독대를 요란하게 두드리며 고요한 어둠을 깨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느새 그 소리마저 아버지의 흔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세월이 흐른 탓일까. 마당 한쪽에 아버지의 서툰 솜씨가 여기저기 흔적처럼 아직 남아 있는 한 아버지는 봄이면 또 다시 네 딸들의 마음에 추억이란 흰 꽃잎을 피울 것이다. 마당 한쪽에 아버지가 만든 작은 연못 그 옆에 손질 되지 않은 채 가지만 무성한 앵두나무와 넝쿨이 제멋대로 뻗어나간 포도나무는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은 아니다. 다만 울타리를 한참 넘어버린 키 큰 감나무가 아버지의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귀가 맞지 않아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낡은 상자처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늘 그렇게 남아 있다.

친정 장독대 옆에 변함없이 우뚝 선 키 큰 감나무. 언제부턴가 감나무는 어머니의 타박거리가 아닌 아버지의 흔적을 그리워하는 가족 모두의 마음을 연결하는 기억의 끈이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가득한 친정 마당엔 아직도 아버지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것 같다.

오뉴월이면 어김없이 꽃이 피는 감꽃에선 아버지 냄새가 난다. 이렇게 감꽃이 피고 질 때마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가족들의 나직한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 올 것이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덕 않던 감나무는 부드러운 봄바람에 감꽃을 휘휘 휘날리곤 한다. 무심히 가을하늘을 올려다 보다 "올해는 감이 참 잘 될 것 같구나." 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문득문득 들려올 것만 같다. 약고 닳아빠진 세상에 우직한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은 감나무가 아닌 아버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