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와 피 / 주인석
처서가 지나면 논에는 벼보다 피가 더 신이 나 있다. 밥을 먹고 나가보면 한 뼘씩 자라 있을 정도로 피는 성질이 급하다. 벼보다 성장 속도가 훨씬 빨라서 벼가 익을 쯤에 피는 종족번식을 끝낸다. 그래서 열매가 익기 전에 솎아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가을 들판에는 벼보가 키 큰 피가 건들거리며 군데군데 서있다. 피의 많고 적음은 농부의 부지런함과 반비례 그래프를 그린다. 우리집 논에도 예외는 아니다. 부모님의 건강이 안 좋으셔서 알뜰히 돌보지 못한 논은 잡초 반 벼 반이다.
휴일이 되어 대대적인 피 소탕작전에 들어갔다. 피 뽑으러 가자는 말에 아이들은 기겁을 했다. 아마도 사람 몸의 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와 일맥상통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여름날 뜨거운 햇볕 아래 고된 작업을 하게 만드는 잡초는 농부 마음의 피를 뽑아댔는지도.
노란색 고무장화를 신었다. 고무장갑처럼 가볍다. 논바닥 흙이 질척거려서 장화를 신지 않고는 작업이 어렵다. 맨발에 신은 장화는 논으로 가는 비포장 길의 감각을 느낄 수 있어 좋다. 돌들의 자극이잠자던 감성에 흥분을 일으키게 할 즈음 논에 도착했다.
자갈보다 더 매끈하고 쫀득한 찰흙이다. 논바닥은 이빨 빠진 입을 오물거리며 내 발을 꼭꼭 물었다 놓았다 한다. 고랑마다 뒤를 따르는 발자국엔 벼 사이로 내려앉은 하늘이 담긴다. 자연에 동화되어 일도 잊고 있을 바로 그때 바람을 덮고 피가 슬쩍 누웠다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피는 보는 각도에 따라서 잘 보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기에 빠뜨리고 지나가기가 쉽다. 특히 어린 피는 벼와 아주 흡사해 구분하기조차 힘이 든다. 세심한 관찰 없이 덜렁대면 벼를 일쑤 뽑는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 벼락같은 야단을 맞는다.
피는 벼 포기에 달라붙어 자라기 때문에 솎아내기 또한 어렵다. 어지간히 힘을 주지 않으면 뽑히지도 않는다. 특히 주먹 피라는 것은 뿌리가 단단하고 뽑아내 놓으면 한 주먹이나 된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주먹피다.
솎아내지 못한 피는 그 열매가 종자로 논에 떨어지고 내년 농사엔 두 배의 힘이 든다. 그래서 피는 어릴 때 확실히 뽑아 내야 한다. 사람의 일도 이와 같을 것이다.
뜨거운 햇볕 아래 콩죽 같은 땀을 흘리며 피 뽑는 작업은 참 하기 싫은 일 중에 하나고 힘이 든다. 벼이삭이 피부에 닿으면 며칠간 알레르기를 일으켜 간지럽다. 강한 볕 때문에 얼굴도 엉망이 되니 여자들보다는 남자들이 피 뽑는 일을 더 많이 한다.
한참을 정신없이 뽑고 일어서니 등짝에 옷이 착 달라붙었다. 우리 논뿐만 아니라 이웃 논에도 두루미 같은 사람들이 보인다. 농약을 뿌리지 않는 곳에는 유달리 잡초가 많다. 유기농이 곤충과 식물의 천국을 만들었다. 화단에 풀 몇 포기 뽑는 기분으로 시작했던 피 뽑기에서 농부들의 고단한 일상을 읽을 수 있었다. 일손 없는 농촌 현실이 여실히 보인다. 푸른 벌판에 고개 박은 두루미가 서글프다.
피가 자라고 있는 동안은 벼와 닮아서 구분하기 어려우나 어느 순간이 지나면 벼보다 훨씬 빨리 자라고 열매 맺는다. 벼가 열매를 맺고 고개를 숙일 즈음 피는 종족 번식을 마친다. 그래서 얼른 손을 써야 한다. 피는 철저하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둔다. 일 년 뒤의 일까지 미리 땅 밑 작업을 한다.
겉모습이 사그라지고 없더라도 또 다른 자신으로 방어하기 위해 열매가 익으면 바로 떨어뜨린다. 그에 비해 벼는 주인이 거두어 줄 때까지 묵묵히 제 몸을 맡기고 꾀 한 번 쓸 줄 모른다. 벼의 모습으로 자라는 피의 거짓이 밝혀지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나처럼 피 뽑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더욱 구분하기가 어렵다.
사람의 진실을 알아가는 것도 이와 같으리라. 내 눈이 어두워 진실을 버린 적이 있었다. 거짓이 먼저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어금니로 깨물어 보고 난 뒤에야 텅 비었다는 것을 알았다. 겉모습만 보고 속까지 알아차리기에 나는 덜 여물었나 보다. 비슷하면 잘 속아 넘어가니 말이다.
J여인과 귀농한 Y여인을 안 것은 작년이다. 두 사람 중 나는 J여인과 더 친했다. 그녀는 애살스러웠고 열정도 대단했다. 누구보다 나한테 살갑게 대했다. 매일 많은 편지가 오갔고 그것으로 모자라 전화도 자주했다. 그래서 그녀가 혼자 어렵게 아이를 키우며 산다는 것도 알았다. 같은 여자로 그녀에게 많은 연민을 느꼈다.
어느 날 그녀가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다. 놀라서 허겁지겁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내게 돈을 빌려 달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런저런 딱한 사정 이야기를 하며 내 마음을 자극했다. 후에 알고 보니 나한테만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마음의 상처가 심한 그녀에게 생활고까지 들이닥쳤으니 그 사정은 말해 무엇 하겠나. 그래도 쓰러지지 않았던 그녀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그런데 Y여인에게서 온 편지 한통을 받고 나는 너무 놀랐다. 그녀의 모든 행적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나는 기겁을 했다. 그녀가 눈물로 들려준 모든 이야기는 처음에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J와 나의 절친한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것 같아 그녀에게 냉정하게 말하고 말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J에게 직접 물어 보았더니 딱 잡아뗐다. 그러면서 J는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Y욕을 하고 다녔다. 마치 논에 피처럼 처음엔 자신을 숨기고 다니다가 들통이 나니 씨를 와락 뿌리며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그럴 때도 Y는 벼처럼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후에 모든 것이 밝혀졌을 때 나도 Y도 J도 예전같이 대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피 같은 사람과 벼 같은 사람이 어울려 산다. 그 속에서 진실을 한 눈에 가려내기란 참 어렵다. 아직은 설익어서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지가 않다. 세월이 흘러 연륜의 나이테가 몇 바퀴는 더 돌아야 될 성 싶다. 가끔 벼를 피로 착각하고 뽑아내어 당황하지만, 그런 과정을 몇 번 겪은 후에라야 피를 구분할 수 있다.
반나절을 논에 엎어져 있다 나오니 온 몸이 땀에 절었지만 논둑에 앉아 먹는 새참은 어떤 맛과도 비길 수가 없다. 우리 삶도 이런 맛이리라. 허기진 삶을 참고 견디다가 먹는 한 그릇 잔치국수 같은 맛, 도시사람 도시생활에서는 평생을 편안히 살고도 도저히 맛 볼 수 없는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야만 느낄 수 있는 맛일 게다.
선문답 한 번 없이 진실을 깨우쳐 주는 그런 스승 같은 자연을 만날 때마다 감탄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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