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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연장통 / 박종희

연장통 / 박종희

 

 

 

지퍼가 달린 작은 가방을 여니 없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요술가방이다. 다양한 종류의 드라이버와 망치, , 톱 등 작게 만들어 보기에도 앙증맞은 연장들이 가득하다. 아파트 입주할 때에 관리소에서 받아 신발장 서랍에 넣어 두고 잊고 살았던 것이다.

새 아파트로 이사한 지 10년이 되도록 쓴 주방 조명기구가 올 봄에 드디어 폭발했다. 전구는 바꾸어 갈면서 조명기구를 바꿀 생각은 못했었는데 수명이 다했나 보다. 전원 스위치를 누르자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더니 갑자기 정전되었다.

점심을 먹다 놀란 남편이 차단기를 내리고 전구를 꺼내려니 전구가 깨지면서 돌려 끼우는 부분이 조명기기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부리나케 연장통을 찾았지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라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급기야는 신발장 서랍에서 찾아냈다. 오밀조밀 장난감처럼 작은 연장도구들이 가방 안에 수북했다. 크기와 종류별로 있는 드라이버와 벤치를 꺼내 작업했지만, 남편의 재주로 조명기구를 고치기엔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이 관리실에 전화를 걸어 직원이 달려오고 새로운 조명기구를 사다가 달았다.

어릴 때 내가 기억하는 친정아버지는 '걸어 다니는 연장통'이셨다. 살던 집도 아버지가 손수 지었다. 집안에 대부분이 아버지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어린 눈에 비치는 아버지는 요술쟁이 같았다. 회사에서 쇠를 녹여 만든 절구와 절굿공이, 연탄집게, 연탄을 덮는 두꺼비집이 모두 아버지의 두 손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뿐인가. 겨울이면 썰매를 탈 수 있는 앉은뱅이 스케이트가 있어 친구들한테 부러움을 샀고, 식구 수만큼 만들어 주신 아령이 있어 운동하는 일도 즐거웠었다.

1년 내내 먹어도 싱싱한 김장김치를 묻어두는 지하실과 마당 한가운데에 물고기를 키울 수 있는 작은 연못도 있었다. 그리고 마음 놓고 목욕을 할 수 있는 샤워실이 있어 한여름에도 걱정이 없었다. 오래되어 낡고 고장 난 것도 아버지의 손이 닿으면 금세 새 것이 되고, 무엇이든 필요한 것은 다 만들어내는 아버지의 손은 연장이었다.

오죽하면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가 만들어주시는 것들이 부러워 주문할 정도였는데 덕분에 아버지의 열 손가락은 지문이 다 지워지고 굳은살로 가득했다. 어쩌다 아버지의 손을 잡게 되는 날은 거북이 등처럼 두껍고 억세어 느낌이 좋지 않았었다.

전등을 고치려고 가져온 연장통을 들여다보니 아버지의 까칠하고 투박한 손이 스쳐 지나간다. 부지런하셔서 당신 몸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가 애지중지하게 여기던 것이 연장통이었다. 그만큼 아버지는 연장통을 아버지 목숨처럼 아꼈다. 옛말에 집사람은 빌려줘도 연장은 빌려주지 않는다고 하더니 아버지를 보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는 기술을 따로 배우지 않으셨는데 손재주가 좋으셨다. 그런데 손재주가 좋으면 몸이 고달프다더니 아버지의 삶도 녹록하지만은 않으셨다. 늘 일을 손에 달고 사셨다. 퇴직하시고는 일이 없어 소화가 잘 안 된다고 하시더니 앞마당을 모두 갈아엎었다. 거기다 감자를 심고 하우스를 만들어 고추도 심고 김장 배추도 갈아 먹는다. 그러던 아버지가 2년전 운동을 하다 쓰러지시더니 이젠 예전 같지 않다. 아버지 몸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그렇게 부지런하시고 몸을 아끼지 않던 분이 피곤해하시며 누워계시는 시간이 늘어났다. 몸의 기관 중 어딘가가 고장이 난 것이다. 집에 있는 물건이 고장 나면 아버지의 손으로 다 고쳐서 썼는데 정작 당신의 몸이 고장 난건 고치지 못했다. 한번 고장 난 몸은 어떤 연장으로도 치유되지 않았다.

2년이 넘게 병원에 다니며 정밀검사를 하고 치료를 받았지만, 노환 앞에선 적십자가 그려진 하얀 연장통도 무용지물이다. 연중행사로 병원에 입원하시며 약을 달고 사시는 것을 뵈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연장으로 고장 난 곳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노환으로 쇠약해진 사람의 몸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치료제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