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 장수영
온 세상이 비에 젖어있다. 화단의 꽃들도 고개를 숙이고 묵언수행에 들었다. 차를 타고 골목을 빠져나와 강물위로 떨어지는 비 구경을 나간다. 나설 때와는 달리 점점 굵어진 빗줄기는 유리창에 떨어져 파편처럼 부서진다.
차 안에서 듣는 빗소리는 연주회에 온 것 같다. 음악회가 끝나고 객석의 기립박수 소리 같기도 하다. 귀는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에 열어두고, 눈은 유리에 떨어져 파편처럼 흩어졌다가 이내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빗방울에 빨려 들어간다. 이따금씩 빗물이 흐르는 유리창은 확대경이 되기도 하고 창밖의 사물이 일그러져 보이게도 한다. 그러다 답답함이 느껴 질 때면 윈도우 브러시를 휙 돌리면 잠깐 동안 말갛게 보이다가 어느새 파스텔 톤의 풍경이 된다.
그림 같은 풍경 앞에서 나를 가두고 있는 이 공간이 유년의 집처럼 느껴진다. 강 건너 멀리 보이는 산의 풍경도 이런 날은 화선지에 그려진 그림처럼 흐릿하기도 하고 어둑한 먹구름을 생각나게도 한다. 먹구름을 떠 올리면 어릴 적 시골집에서의 장맛비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논날 같이 비가 내리면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다. 즐겨하던 고무줄넘기나 땅따먹기, 술래잡기를 할 수 없어서 심심한 생각이 들곤 했다. 동네 아이들이 재잘거리던 담 너머 배꼽마당도 나만큼이나 심심해 보였다. 마당 낮게 날던 제비도 보이지 않고 폴짝거리던 강아지도 제 집에서 눈만 말똥거린다. 그러면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멀미가 나도록 쳐다보았다. 비오는 하늘은 아득하기만 할 뿐 떨어지는 비는 빗방울인지 빗줄기인지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것을 쓸쓸함이라 생각했다. 그 때는 쓸쓸함이 그러한 것인 줄로 알았다.
빗물이 길게 선을 그으며 떨어지면 내 눈도 뜨락 아래 툭 떨어져 터지는 빗물에 눈이 멎었다. 떨어진 빗물은 물방울을 만들고 낮은 곳으로 흘렀다. 떠내려가는 물방울이 가는 길을 따라 뒤안길로 내 달린 적도 있었다. 물방울들은 물길을 따라 떠내려가다 미처 돌기도 전에 돌부리에 걸려 흔적 없이 사라지곤 했다. 빗물은 집 울을 돌아 샘가 빨래터를 지나 도랑으로 밀려갔다. 도랑의 물은 잠시 얼쯤 대다가 큰물에 섞여 큰길가 작은 폭포로 이어지면 내가 따라가던 황토 빛 빗물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서둘러 당도할 곳이 어디 있는지 그 당시에 내가 아는 세상은 신작로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물의 길을 알 수 없었다.
장마가 들면 엄마는 비설거지에 동동거려도 내리는 비가 고맙다. 어느 구름이 비를 내려줄지 마른하늘만 쳐다보며 애가 탔던 날도 다 잊고 “아따. 비가 억시로 마이 오는구나.” 반갑다는 엄마의 추임새다.
장마가 길어지면 엄마는 들일 보다도 부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빻아둔 밀가루 포대를 풀어놓고 밀가루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시골에서는 잘 먹어 볼 수 없는 호떡과 찐빵 그리고 만두까지 엄마는 모든 것을 척척 만들어 냈다. 언젠가 장에서 사온 찐빵 보다 달지는 않았지만 옹색한 살림살이에 엄마표 간식거리는 달콤하고 구수했다. 이런 호사도 누릴 수 있는 것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철이 들 무렵 우리 집은 누에치기를 했다. 알을 따듯한 방에 펼쳐놓고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처음엔 씨앗인 줄 알았다. 누에는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가 되어 꼬물거리면서 잘게 썬 뽕잎을 먹기 시작했다. 어린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는 소리는 사각 거리며 보슬비 오는 소리 같았다. 누에가 자라는 따뜻한 방에서 자는 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누에가 자라면서 하루에 몇 번씩 주는 뽕잎은 자고나면 앙상한 잎맥만 남겨두고 다 갉아 먹었다. 그러고도 뽕잎이 모자라는 지 잎맥위에 올라서 머리를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댄다. 그러다가 누에가 석 잠을 자고나면 기하급수적으로 자라 큰 뽕잎은 물론 가지째 누에 위에 올려놓으면 뽕잎 갉아 먹는 소리가 소나기 소리와 흡사했다. 소나기 소리는 어느새 쏟아지는 빗줄기를 떠 올리며 마당 한가운데에 어리벙벙하게 서 있는 듯 했다. 소나기 소리가 좋아 누에가 넉 잠을 자고 섶에 올라갈 때 까지 그 방에서 동거를 했다.
빗소리가 좋았던 것은 고모가 나를 업고 마실 다닐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처녀였던 막내고모는 비가 와서 한가해지면 나를 업고 이웃집 나들이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바쁜 엄마의 품을 일찍 떠난 나는 늘 엄마의 사랑이 고팠고 고모 등에 업히면 엄마냄새처럼 좋았다. 비 오는 날 고모 등에 업혀 있으면 우산을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 달콤한 잠에 빠져든 적도 있었다. 그 때 시골에서는 처녀가 혼자 밤마실을 잘 가지 않던 때라서 다 큰 나를 업고 나들이를 갔던 것 같았다. 그 때 고모 등에서 들은 빗소리는 내 오랜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결혼을 하고도 빗소리를 좋아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베란다 지붕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아득히 먼 곳 고향으로 나를 데려가곤 했다. 한 겨울에도 비가 오면 창을 한 뼘 정도 열어두었다. 찬바람에 어깨가 시리면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당겨 덮는다. 그리고는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온 밤을 뒤척였다. 때로 내가 먼저 잠든 후에 비가 내린다면 “어, 비 온다.” 하고 남편이 귓속말로 나를 깨웠다. 남편도 나와 함께 듣는 빗소리를 좋아했다.
비를 좋아하는 남편은 선술집을 좋아했다. 날이 저물고 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큰길가 포장마차에 들르곤 했다. 작은 파라솔 아래 간이 의자는 빗줄기에 내 엉덩이조차 온전히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아래 둥근 테이블에 어깨를 웅숭그리고 바짝 다가앉으며 비를 피해 보지만 흩뿌리는 비바람은 더욱 머리를 맞대고 바짝 다가앉게 했다. 기분이 좋은 날이면 응당 숨소리도 달게 느껴 질 테지만 다투고 난 뒷날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그러면 말이 없는 남편은 화해하는 방법을 몰라 자꾸 술만 권했다. 그 때 내가 먼저 손을 내 밀어 화해를 청해 볼 걸. 때 늦은 후회를 해 본다.
비 오는 날 혼자 주점에 앉아있다. 함께 했던 남편이 빗줄기를 타고 먼 길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나란히 앉거나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였던 그날을 기억하며, 아무도 오지 않는 낡은 집 지붕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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