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메뉴 / 박경대
입이 궁금하여 냉장고에서 캔 맥주 하나를 꺼내었다. 그때 옆에 붙어있던 메모지가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을 봐 달라는듯하여 주워 읽어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반찬과 국, 그리고 특별난 음식을 적어둔 일종의 메뉴로 모두 아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아마 시간이 있을 때 만들어 먹으려고 적어둔 것 같았다.
예전에 다녔던 직장에는 식사 면접이 있었다. 대표께서 직원을 채용하기 직전 반드시 같이 식사를 하였는데,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당락을 결정지었다. 그런 사연은 입사한 뒤에 알게 되었다. 그분은 음식을 씩씩하게 그리고 남김없이 먹는 것을 좋아하셨다. 해작거리며 먹으면 불합격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의 면접날은 행운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들만 나왔기 때문이다.
먹을 게 궁핍하던 예전과는 달리 요사이는 맛있는 먹거리가 지천이다. 그래서인지 외손자가 밥을 잘 먹지 않는다며 딸아이는 걱정이 많다. 먹을 때도 좋아하는 한두 가지 반찬만 집는다. 골고루 먹으면 좋으련만 균형 잡힌 식단이 되지 않을까봐 염려된다. 허나 반찬투정을 하여도 편식이라면 내가 더 심하기에 입도 뻥긋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귀하게 자라지도 않았던 내가 무슨 이유인지 못 먹고 안 먹는 것이 많았다. 군대를 다녀온 뒤로 조금 달라졌지만 그전에는 돼지고기, 소고기도 먹지 않았다. 한번은 시골에 모임을 갔다가 보신탕을 먹는다기에 기겁을 하고 달아난 적도 있었다.
입이 짧은 탓에 가장 불편한 것은 단체로 식당을 갈 때이다. 음식을 내 입에 맞추기가 어려워 앉아있는 시간이 고통스러운 경우가 많다. 복요리는 물론 먹지 않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좋아하는 매운탕이나 찜 요리를 비롯하여 닭백숙과 닭곰탕 심지어는 갈치나 추어탕도 먹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젓갈이 들어간 음식은 어떤 것도 싫어하니 김장김치에도 젓을 넣지 않는다.
제사에 쓰는 조기와 상어고기는 물론 모든 생선은 늘 아내 몫이다. 얼마 전, 여수로 해양박람회 구경을 갔던 적이 있었다. 간 김에 그곳에 사시는 사돈에게 전화를 했다가 냄새도 못 맡는 홍어요리 식당으로 초대받아 사양하느라 애를 먹었다.
고기와 생선 중에 먹지 않는 것이 많지만 과일 중에도 내 몸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더러 있다. 털복숭아는 보기만 해도 가렵기 시작한다. 보는 시간이 길어지면 먹지 않아도 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난다. 전에는 가끔 먹던 자두조차 요사이는 가려워서 먹지 않는다. 친구와 음식이야기를 하다 시금치를 비롯하여 토마토나 가지도 먹지 않는다하면 모두들 좋은 것은 골라서 안 먹네 하면서 웃는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런 것 같지만 다행히 아직 건강은 괜찮다.
가리는 음식이 많으니 혼자서 멀리 여행을 다닐 때면 힘이 든다. 근래에는 어디를 가도 한식당이 있어 별 어려움이 없다. 설령 식당이 없는 오지라도 항상 몇 가지 밑반찬을 챙겨 가기에 나아졌지만, 2~30년 전에는 곤욕을 치른 적이 많았다.
인도에서 밀가루 떡인 ‘차파티’와 우유에 홍차와 생강을 섞은 ‘짜이’에 질려 이틀간 과일만 먹기도 했다. 또한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한동안 커피와 빵만 먹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만난 한국여성으로부터 컵라면 하나를 얻어먹었는데 얼마나 고마웠던지 눈물이 날 정도였다.
아내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밥하기 싫을 때면 항상 나의 짧은 입을 나무라며 반찬 할 게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회사에서 점심을 먹다가 일주일치 메뉴가 적힌 메뉴판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묘안이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으로 메뉴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국과 반찬, 찌개를 분류하여 목록을 작성하여 보았더니 입이 짧다는 나도 잘 먹는 것들이 예상외로 많았다. 두부요리를 좋아하고 김도 좋아한다. 간장에 참기름으로 비벼서도 잘 먹는다. 깨소금은 몇 숟갈씩 먹을 수 있고, 고추장만 있어도 밥 먹는 것은 문제가 없다. 오징어무침이나 콩자반 또한 좋아하니 몇 가지 먹지 않는다고 타박 받을 정도는 아니다.
그 뿐인가? 튀김은 대부분 좋아한다. 특히 새우나 들깻잎 튀김이 있으면 자다가도 일어날 정도이다. 갓 버무린 김치도 잘 먹고 부침개도 내입에 맞다. 파전, 굴전, 미나리전 등은 부치는 소리만 들어도 막걸리를 사러간다. 청국장도 좋아하고 다슬기국은 열흘 내리 먹기도 한다. 납작 만두와 군만두는 물론 찐만두도 즐겨 찾는다.
고작 한두 시간 생각한 메뉴였지만 적을 곳이 없을 정도로 많았다. 다음날, 적은 종이를 코팅하여 주방의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놓았다. 윗부분에는 “아, 오늘은 무슨 반찬을 만들까”라는 제목도 적어 놓았다.
메뉴판을 붙여 둔 그날 저녁 아내는 그것을 보고 웃음보를 터뜨리며 앞으로 참고하겠다고 말했다.
그 덕으로 반찬이 차츰 바뀌었다. 좋아하는 반찬을 한 가지만 더 차려도 밥맛이 달랐다. 한동안 아내는 한두 가지씩 메뉴를 바꿔가며 상을 차렸다. 좋아하는 반찬이 식탁에 오르니 식사 때마다 오늘은 무엇일까 하는 기대감에 작은 흥분마저 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낮에 집에 잠시 들렀더니 마침 아내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식탁에는 달랑 식은 밥 한 공기와 아침에 내가 먹다 남긴 반찬 한 가지였다. 왜 그렇게 먹느냐는 말에 아내는 혼자 먹을 때는 반찬을 만들기도 귀찮고 찬값 또한 만만찮아 늘 그렇게 먹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아내가 너무 애처롭게 보였다.
엊그제 아내는 “당신 입에 반찬을 맞추다보니 좋아하는 젓갈이나 갈치는 구경도 못한다.”며 낙담한 듯 말했다. 아마도 메모는 그때 쓴 것 같았다. 누구나가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이 있는데 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았다.
아내의 메모지를 한참 보다가 아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새 종이에 옮겨 적었다. 다음날 그것은 떨어졌던 곳이 아닌 나의 메뉴판 옆에 “스페셜 메뉴”라는 제목을 달고 자리를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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