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 정목일
비 오는 여름, 있어도 없어도 그만일 듯한 개망초꽃이 되어 들판에 나가 보았어. 비안개 속으로…….
누가 부는 것일까. 한 가닥 실바람 끝에서 실로폰 소리가 들려왔어. 무논에 펼쳐놓은 초록빛 융단 위에 문득 드러눕고 싶었어. 그냥 논바닥 위에 누워 버릴까……. 한 포기 벼가 되는 거야. 한 알의 비안개 미립자가 되는 거야. 무논의 물과 부드러운 흙에 닿아 있는 벼들의 수염뿌리가 되는 거야.
희부옇게 비안개 속에 펼쳐진 외로움의 광막한 공간……. 숲속이나 안개 속에선 머리 위로 커다란 장막이 둘러쳐져 그 안에 모든 것들이 한 세상에 있음을 느꼈어.
나를 낳게 한 것은 이 대지(大地)가 아니었을까. 들판에 드러눕고 싶은 건 한 알의 씨앗이 되어 마침내 땅에 묻히게 되는 까닭 때문일 거야.
농부는 어깻죽지가 빨리 썩어야 흙으로 편안히 돌아가고, 썩고 썩어야 향기로운 새 생명이 탄생하는 법이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물음 속에 갇혀서 안개처럼 어디로 흘러갈까.
비 오는 여름 들판에선 초록빛 생명의 피비린내가 풍겼어. 대지에 묻힌 자의 썩은 흔적 위에 생명의 떡잎들이 피어나서 진초록의 핏내음이 자욱했어. 누구나 어머니의 젖무덤같이 부드러운 땅의 속살에 한 톨의 씨앗이 되어 묻히게 될걸. 썩은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
노인은 볍씨처럼 땅에 묻혀 다시 태어나고 초목의 초록은 짙어가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거야.
나는 개망초일 수도 한 포기 벼일 수도 있어. 비안개 한 알의 미립자인걸. 한 알의 흙일 따름이야. 물은 구름이 되고 또 강물이 되어 흐르지. 모든 게 흐르고 있어. 죽음은 생명을 낳고 생명은 죽음을 위해 있어. 나는 비안개 한 알의 미립자가 되어 떠돌고 있지만, 언제나 너에게 닿고 있어. 너의 손, 이마, 눈동자, 입술에 닿고 싶어. 닿으며 손잡고 흐르고 싶을 뿐…….
작년 가을, 산길을 걷다가 소나무 밑 바위에 쉬고 있었어. 무심코 바짓가랑이에 풀씨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곤 하나씩 떼어내고 있었어. 허공중에 흩날릴 풀씨 한 알을 들여다보면서 일생(一生)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생각했어. 꽃은 잠시 피어 시들고 사라지는구나. 그 생각의 끄트머리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어. 끝이 아니야. 버려진 듯 하찮아 보여도 귀중한 결실이었어. 꽃으로 피어 이루고 싶은 소망이었어.
인간의 무덤 위에 풀들은 자라고 사라지지 않아. 풀씨 한 톨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맥박…….
꽃향기가 풍겨왔어. 생명의 궁전이었어. 끝이 아니라 언제나 시작인 영원을 잇는 고리였어.
비안개 덮힌 여름 들판에 나가 보면 모두가 한 세상 속에 은밀히 닿아 있음을 느껴.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존재의 의미도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한 개의 미립자일 뿐이야. 한 알의 모래알…….
가끔 깨닫곤 하지. 나는 없어도 좋을 듯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한 알의 씨앗이 되려면 사랑과 삶의 의미로 뭉쳐진 결실이 있어야 한다는걸. 그래야 싹이 나고 떡잎이 나지 않을까.
싹을 틔우는 씨앗 하나 되는 것도 예사롭지가 않아. 나는 그냥 무의미한 존재가 아니야. 삶에 무게를 담아 한 톨의 씨앗이 돼야 해. 언젠가 눈을 감고 대지에 드러누울 수 있게. 들판에서 싹을 틔울 수 있게.
내 일생도 씨앗이 될 수 있을까. 다시 돋아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썩을 수 있을까. 개망초는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아니었어. 흙도 죽은 자의 넋과 흔적이 이룬 한 알씩의 결정(結晶)이었어. 실낱 같은 바람 한 가닥도 생명을 키우는 힘살이었어.
작년 가을에 보았던 그 풀씨들은 어느 곳의 초록이 되었나.
나는 대지가 포근히 맞아줄 씨앗 한 톨이고 싶어. 초록이 되고 들판이 되고 싶어. 너와 함께 무지개로 떠오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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