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 / 조내화
내 책상 위에는 가을이 앉아 있다. 향긋하게 가을향기를 풍기고, 노릇노릇하 색깔은 가을의 맛을 가득 담았으며, 갸름한 몸매는 애인을 삼아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내 방을 찾아온 어느 누구도 관심조차 두지 않고, 가져가려고 욕심을 부리는 이도 없다.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을 뿐이다.
가는 가을이 아쉬워 여유를 부리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어제 불던 바람에 탱자가 떨어져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주워가는 사람이 없으니 발에 밟히고, 자동차 바퀴에 치여 속살을 드러냈다. 아무도 아까워 하지 않은 듯하여 나 혼자라도 챙겨주어야 할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시덤불 속에서 몇 개를 줍고, 길 옆 도랑을 보니 떠내려가던 탱자들이 나뭇잎에 걸려 묻혀 있었다. 두 손에 가득 들고 수돗가로 달려가 깨끗하게 손질하며 향긋한 냄새에 취하며 가을을 느껴 보았다. 수건으로 말끔하게 물기를 닦은 뒤 책상위에다 올려놓았다.
가을이 되면 산소에서 묘제를 지낸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보물이 바로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유자다. 예쁜 여자들에게나 맡을 수 있는 향내도 그렇고, 만져보면 쭈글쭈글하며 부드러운 감촉도 유자의 매력이었다. 할아버지가 챙겨다 손자들에게 준 과일이니 할아버지의 사랑이 숨어있는 귀중한 선물로서 친구들에게 큰 자랑거리가 된다. 하지만 그런 영광을 누리기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유자가 욕심난 어느 날, 나는 묘제를 지내는 할아버지를 따라 나섰지만, 할아버지는 나의 그런 소망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집어 주려하지 않으셨다. 유자에 대한 갈망은 주위에서 쉽게 얻을 수 있고, 대신할 수 있는 탱자를 주우러 가는 발걸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탱자나무가 있는 곳은 마을에서 10여리 떨어진 과수원 울타리였다. 울타리는 온통 탱자가 어른 키보다 훨씬 높으니 과수원 안의 모습은 알 수가 없었다. 생각 없이 울타리에 붙어 탱자를 따고 있는데 사나운 개 짖는 소리와 함게 주인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과수원에 숨어들어 과일을 훔쳐가는 도둑으로 몰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겨우 탱자 몇 개가 주머니 속에서 달랑거릴 뿐이었다. 서운한 마음을 모아 친구들과 탱자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탱자는 내 주머니에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았다. 못내 아쉬워하는 모습에 친구가 달랑 한 개를 주니 고맙게 받아들고 와서는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아쉬움을 달랬다.
탱자와 사촌인 귤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모양새는 비슷하지만 용도는 전혀 달랐다. 껍질을 까서 입에 넣었을 때의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맛은 어릴 적 탱자를 입에 넣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맛이었다. 그런데 이 귤이 탱자나무와 접붙이기를 해서 맺힌 열매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세상에는 같지만 같지 않은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중국 고사에 나오는 화남의 귤이 화북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는 고사의 의미도 알게 되었다. 화남에서는 흰색의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맛있는 과일로 자라는 귤도 물과 땅 등의 환경이 다른 화북에서는 그 맛을 잃고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해버린다는 사실이다. 어느 곳에 어떻게 존재하느냐가 그 물건의 가치를 결정해준다는 사실은 이미 교육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남겨 두고 있다.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를 위해 이사를 세 번이나 했다고 하지 않는가! 맛있는 과일로 자랄 자신의 아들을 위해 좋은 환경을 택해주려는 부모의 마음을 표현하는 이야기이리라.
현관에 제법 크게 자란 귤나무 화분이 두개 놓여 있다. 봄에 예쁘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더니 요즘에는 탱자만한 귤을 매달고 서있다. 분명 귤나무인데 매달린 행색은 귤보다는 탱자를 닮았다. 제가 마음껏 자랄만한 환경이 못 되었나 보다. 귤 화분을 보면서 왜 갑자기 학교 다닐 때 매일 외우고 외웠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떠오를까? 민주주의라는 달콤한 귤을 따고 싶었던 사람들이자가 열리는 환경을 조성해 놓고 귤이 매달리기를 빌며 내 걸었던 구호라는 생각이 든다. 귤이 욕심이 나서일까? 아니면 탱자라고 놀림을 받을까 싶어서일까?
나는 많은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한다. 맛있는 귤이 되라며 채근하기도 하고 격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탱자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귤이 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밝고 따뜻하며 열린 마음으로 대하는 시간보다 엄하게 규제하며 움츠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해본다. 또 귤만이 가치가 있고 탱자는 쓸모 없다하며 어린이들을 내몰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곤 한다. 탱자를 심어놓고 귤로 자라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책상 위에 놓인 탱자는 가을을 담뿍 담고 와서 자랑스럽게 앉아 있다. 귤에게 과일로서의 영광은 넘겼지만, 노란 열매로 가을의 향을 교실에 풍기고 있으니 이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닐까? 귤은 귤로 자랄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어 달콤한 과즙이 흐르게 키워내 탱자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하지만,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탱자들에게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도록 해주어야하지 않을까?
내일 탱자나무 밑으로 가서 다시 탱자를 주워서 이 교실을 가을 향기로 채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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