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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기다리는 여심(女心) / 윤명희

기다리는 여심(女心) / 윤명희  

 

 

 

불에 댄 듯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사이에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머릿속이 휘황하다. 깔린 이부자리는 자리의 주인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걸 보이려는 듯 얌전하다.

조금 전, 1시를 가리키던 시계가 2시를 막 지나고 있다. 전화기를 들어 귀에 대어본다. 고장이 아니라고 신호음이 이어진다. 아이들 방문을 열었다. 아이들의 잠버릇에서도 성격이 보인다. 자기 것을 철저히 잘 챙기는 큰애는 이불을 돌돌 말고서 얌전히 새근거린다. 온 방안을 얼마나 돌아 다녔는지 작은 아이는 몇 권이 빠진 책꽂이 한 구석에 머리를 박고 웅크린 채 자고 있다. 아이를 바로 뉘고 돌아 나와서 무심코 욕실 안을 들여다본다. ! !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가슴 속을 후려친다.

전화기를 들고 다시 번호를 꾸욱 눌러보지만 전화는 여전히 꺼져있다. 냉장고를 열었지만 왜 열었는지 기억에 없다. 찬 기운이 얼굴을 한참이나 덮치고서야 문에 얌전히 서 있는 물병을 꺼내들었다.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없다. 식탁위에 놓여 진 물 컵을 만지작거리다 환한 거실의 불빛을 낮췄다. 이러고 있는 내 모습이 보기 싫다. 마치 온 동네에 저 집은 아직 안 들어 온 사람이 있다고 광고하는 듯 환한 불빛. 아무 연락도 없이 들어오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럽다. 불빛보다 환한 달빛이 대신 들어와 나를 건드린다.

창문을 열었다. 찬 밤공기가 훅 밀려들어온다. 혼자 서 있는 목련 꽃잎이 외롭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손님 접대가 많은 남편인지라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쯤은 고주망태가 되어서라도 돌아와 있어야 할 시간이다. 잠결에 닿는 따가움에 아빠의 얼굴을 힘껏 밀어내는 아이들에게 뽀뽀는 해야 한다. 팔짱끼고 서서 찢어질듯 눈 돌아가는 마누라 눈치를 보며 이부자리에 무너져야한다. 양말과 바지를 벗기고 매몰차게 엉덩이를 때리는 찰싹 소리와 함께 코고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그런데 없다.

20분이 지났다. 창문을 닫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책을 펴 보지만 눈앞이 하얗다. 책을 집어 던지고 카세트를 찾는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이 밤엔 신경질적이다. ‘!’소리가 나도록 음악을 끄고 콘센트까지 뽑아버리고 나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사고가 났나? 어디로 알아봐야 하지? 폰은 왜 꺼져 있는 거야.’ 미움으로 시작된 기다림은 걱정의 길로 치 닿는다. 스웨터를 걸치고 슬리퍼를 끌고 대문을 나섰다. ‘지금쯤 오고 있을지 몰라큰길까지만 가면 지금 막 도착한 택시에서 비틀거리며 내릴 것만 같다. 내 마음보다 급한 그림자가 한발 앞서 골목을 빠져나간다. 세상이 잠든 시간,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졸던 슈퍼 아줌마도 잠들었다. 의자를 슬그머니 당겨 도로가 보이는 쪽으로 앉았다. 낮에는 그렇게 정체되던 도로도 잠을 잔다. 가끔 지나는 택시가 잠을 깨운다. 목을 빼고 쳐다봐도 간간이 오는 택시는 서지 않고 어딘가를 향해 줄행랑을 친다. 가로등 아래 흐드러진 벚꽃이 바람에 꽃잎을 날리고 있다. 내 머릿속은 우박이 내리고 내 머리 위에는 꽃눈이 내린다. 마주 보이는 주유소 불빛 아래 청년도 졸고 있다. 멀리 모텔간판 불빛이 또렷하게 보인다. 가요주점 불빛이 휘황찬란하다. 이 밤에 그들만이 깨어있다.

혹시?’ 불현듯 의심이 솟구친다. 아닐 거라고 꾹꾹 누르지만 발가락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는 갯벌의 진흙처럼 의심은 자꾸만 기어 나온다. 텔레비전에서 본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그 속에 같이 흐느적거리는 남편이 보인다. 절대 용서 할 수 없다. 긴 욕지기가 목구멍까지 찼다. 입을 열면 그것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튀어 나와 사정없이 덮어 버릴 것 같아 입을 더 꼭 다물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벌떡 일어서니 의자 넘어지는 소리가 정적을 깬다. 골목 초입까지 가다 다시 되돌아 나왔다. 마음이 지옥이다. 울음이 코끝에 매달린다. 걸음이 마음만큼 빠르고 생각이 현실보다 빠르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고개를 가로 젓는다.

순간, 손님 접대를 할 때 손님보다 먼저 술에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지는 거라며 손님을 보내고 나면 술이 팽 돈다는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손님 접대에 술을 너무 마셔서 어디선가 꼬꾸라져 자고 있을지도 몰라. 한 번도 나를 실망 시킨 적은 없었어. 아마 지금도 그럴 거야.’ 순간의 생각이 바뀌자 방금까지 내 마음 속에서 우글거리던 그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갑자기 편해진 내 자신에 놀랐다.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았다.

일체유심조야. 이게 일체유심조야.’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이 만든 것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지옥에서 벗어나는 건 찰나였다. 내 마음이 한 사람을 죄인도 만들고 성인군자도 만드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 자리에 가만히 변함없이 있는데 말이다.

빨리 집에 가 봐야 한다. 혹시 다른 길로 와 있을지도 모른다. 맞은편에 빠르게 걸어가는 한 남자가 보인다.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저 사람이 혹시 나에게 시비 걸지는 않을까? 새벽에 돌아다니는 나를 이상한 여자 취급하지는 않을까?‘ 보금자리를 향해 바삐 가는 그를 나는 또 치한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 이것도 일체유심조야주문을 외듯 일체유심조를 내 뱉으며 골목에 들어섰다.

혹여나 이른 새벽에 잠깨는 이웃이 있을세라 슬리퍼 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골목에서 보이는 우리 집 거실 불빛에 변함이 없다. 대문에 열쇠를 꽂다 섬뜩한 육감에 뒤돌아 나왔다. 얼핏 옆집 대문 앞에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심스레 살그머니 다가서니 사람의 한쪽 발이 보인다. 흠칫 놀라 멈췄다. 그 발의 움직임이 없다. 다시 용기를 내어 다가섰다.

그토록 내가 기다리던 남편이다. 내 생각 속의 모텔에 있던 남자가,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자고 있는 것이다. 한참을 어이없어 하며 바라보았다. 같은 시기에 비슷하게 지은 집들이라 가끔 헷갈리기도 한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언제부터 앉아 잠들었는지 여유롭게 코까지 골면서 잘 수가 있을까. 남편의 어깨에 손이 닿자 찬 기운이 내게로 온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는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남편에게 나는 한 마디의 잔소리도 할 수가 없다. 내 어깨를 감싸 안는 남편의 옆구리만 툭! 칠뿐이다. 내가 그를 가요주점에서 모텔까지 끌고 갔다 온 죄인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