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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모과처럼 / 정경희

모과처럼 / 정경희

 

 

 

흙냄새가 그리울 때가 있다. 평안과 쉼의 향기 때문이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가 자연 속에 묻힌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래서 죽어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다.

이 세상에서 썩지 못하고, 사라지지 못하고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는 것만큼 끔찍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향기 나게 죽지 못하고,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죽음을 맞지 못하는 것은 더욱 비참하다.

나는 살면서 가끔 죽음을 생각해 본다. 나이 드신 분들이 들으면 못할 소리라고 혼내겠지만 '죽음'이란 말은 나에게서 낯선 말이 아니다. 가까운 세 사람의 죽음을 겪고 난 후에 '아름답게 죽자, 라고 되뇌었다.

중학교 삼학년 때 할머니의 죽음을 맞았다. 오리 모이를 주려다 토방에서 낙상한 할머니께서는 병상에서 삼년 간 고생하시다 아흔 하나의 연세로 돌아가셨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 채 누워 계시는 할머니 앞에서 어른들은 얼른 돌아가시라고 채근하는 걸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여가 나갈 때서야 난 눈물이 나왔고 다른 사람들도 그다지 울지 않았다. 할머니께서 너무 오래 사셨던 까닭일까? 할머니의 죽음은 주위 사람들에게는 짐을 더는 일이었다. 더 이상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질경이 같은 죽음이었다.

두 번째는 어머니의 죽음. 큰 수술을 한 지 일년 되던 해 행상을 나간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해 장출혈로 돌아가셨다.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어머니는 더 사셔야 했다. 자식들의 신세를 안 질 거라고 행상을 하다 일생을 마친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넋을 놓고 울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아직 더 살아서 고생한 만큼 자식들의 효도를 받을 차례였는데 환갑도 못 넘겼다. 나는 부처를 모실 절의 당간 지주가 폭풍우에 쓰러진 것처럼 아뜩했다.

내가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자고 생각한 것은 넷째올케의 죽음을 맞은 후였다. 나와 나이가 같은 올케는 순박한 산골처녀였다. 대학을 졸업한 오빠와 초등학교를 졸업한 언니는 학력 차이가 나도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

친정엄마처럼 깨, 고춧가루, 감자를 한 보따리 싸 주던 마음이 따뜻했던 언니, 아내의 병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오빠는 닥치는 대로 위암을 치료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그러는 동안 언니는 머리가 빠지고 음식을 못 받아들여 점점 야위어갔다.

그 해 겨울 날 밤, 친정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밤을 넘기기 어렵단다. 나중에 후회될지 모르니까 보고 가거라." 한 달 전 막내딸 돌잔치를 끝낼 때와는 전혀 딴판인 언니의 얼굴을 보고 그만 병실을 나왔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과 눈 밑에 짙게 드리워진 보랏빛 그림자. 입술은 말라 피가 터져 눌어붙었고 눈동자는 초점 없이 돌아가고, 언니는 아프다는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죽음의 전주곡인 듯, 아직 살아 있다는 신호인 듯 간신히 신음소리만 들렸을 뿐, 언니는 마치 말라 비틀어진 황태 같았다.

언니에게서 죽음의 징후가 보였다. 오빠와 사돈처녀는 계속 피똥을 닦아냈다. 언니는 저 세상에 가지고 가기엔 너무나 무거워 이 세상의 미련과 욕심을 모두 쏟아내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간호사가 심장박동기를 꽂았다. 삶의 박동은 언제 끝날 것인지 초조했다. 불규칙한 심장의 파장은 꽤 오래 갔다. 예고된 죽음을 기다린다는 게 이처럼 힘든 일일까. 조금 잔인하지만 나는 지루한 고통의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도했다.

새벽 세 시, 언니는 다물어지지 않은 입을 꿈쩍거리고 눈동자를 미미하게 움직였다.

"뚜뚜 뚜-."

어느 순간 기계의 파장이 일적선이 되었다. 나는 쫓아가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는 코드를 빼고 으레 해왔던 것처럼 침대 치울 준비를 했다. 언니의 몸은 아직 따뜻했다. 이렇게 따뜻한데, 이게 정말 죽은 사람의 몸일까 의심이 갔다. 간호사는 재고의 여지없이 쓰레기를 처리하듯 언니를 데리고 갔다.

"-!" 갑자기 병실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언니를 살려내! 누구 때문인데, 왜 우리 언니가 죽어야 되는데-.'

오빠를 때리며 절규하는 사돈 처녀의 통곡이 밤하늘을 찢어 놓았다.

다리의 기운이 빠졌다. 큰일을 치루고 난 뒤의 허허로움이 밀려왔다. 시내를 바라보았다. 새벽하늘의 별들은 희미했다. 간간히 자동차들의 불빛이 새벽을 달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네온사인이 깜박이고 있었다. 도시는 눈을 뜨고 꿈틀거렸다.

내가 지켜본 세 죽음은 향기롭지 못하다. 퀴퀴한 냄새 속에서 환영받지 못한 삶을 마감한 할머니, 온 몸이 핏빛으로 물들어 자식들 가슴에 응어리진 어머니, 사랑하는 아이들을 두 눈에 넣지도 못한 채 눈감은 올케,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삶의 의지를 버린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가망 없는 삶을 붙잡고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 모두가 고통을 당하게 하는 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마음대로 못한다.

하지만 죽음의 색깔은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병마가 거무칙칙하게 남은 삶을 칠하게 내버려두는 대신 내가 붓을 들고 남은 생의 도화지를 파스텔 톤으로 칠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자신의 삶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죽어간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죽음인가. 차라리 칼을 대지 않고 시골에서 애들과 보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게 방사선 치료에 시달리다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모습보다는 아름답지 않은가.

불치병으로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비참한 모습보다는 정갈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지독한 방사선 치료에 내 몸을 맡기느니 고통들을 안고 살아가겠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산 따라 물 따라 혼자 여행을 떠나련다.

산과 들을 더 많이 눈에 담고, 가슴에 강물과 바닷물을 가득 퍼 담고 싶다. 아무 곳이나 병든 내 몸을 받아주는 자연 속이라면 안심하고 맡기련다.

향기 나게 죽을 수는 없을까. 나는 하찮은 모과에서 죽음의 자세를 배운다.

가을이 되면 모과를 바구니에 담아 놓는다. 못생겼다고 구박받는 열매이지만 달콤새콤한 향기, 샛노란 빛깔과 윤기 나는 몸에서 풍요로운 가을 정취를 느낀다.

찬바람이 불 때 모과를 버리다고 문득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시일이 많이 지나도 모과는 썩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 까만 점이 생겨 까뭇까뭇하게 하루하루 썩어 가는데도 그리 흉하지가 않아 버리지 않는다. 썩은 부위가 물러지지 않고 진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모과가 온통 까매질 때까지 그대로 놔둔다. 그때에도 모과는 향기를 잃지 않고 있다. 속으 쪼개어 보면 코코아 케익처럼 말라 있다. 버릴 때에는 솜뭉치를 버리는 것처럼 가볍고 미간이 찌푸려지지가 않는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삶을 마감할까. 모과처럼 겉모습이 변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향기를 간직한 채 썩고 싶다. 속은 썩는다 해도 형체가 흐무러지거나 지독한 냄새를 풍겨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 않는, 남에게 짐이 되지 않는 죽음 말이다.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나는 마음을 가다듬는다. 내 죽은 후에는 모과처럼 달콤새콤한 향기가 오래오래 배어나왔으면 좋겠다.

그 사람은 속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은 작고 하잘것없는 풀꽃도 사랑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은 고통까지도 가슴에 안은 사람이라고……. 그의 삶은 소박하고 은근한 향기가 풍겼노라고 산골짜기마다 메아리쳐 올렸으면 좋겠다.

가을은 저만치 멀어져 가는데 내 가슴에는 모과 영글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모과향이 코끝을 간질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