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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못 / 이금태

/ 이금태

 

 

 

깊고 푸른 수변공원 저수지물이 거대한 아파트 불빛을 삼킨다. 일렁이는 물결 속에 시간이 잠긴다. 잠시 스쳐가는 인연들이 저 물속에도 있으리라. 밤이 찾아오는데도 생명체들의 몸짓이 분주하다. 세월의 등에 밀려오는 여름의 그림자. 올 한해도 무척 더울 것 같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에 홀리듯 못을 바라본다. 물속 생명의 숨소리에 물방울이 튄다. 수도 없이 그려지는 크고 작은 동그라미의 부드러운 곡선 따라 하늘의 손길을 느낀다. 못 둑에 터 잡은 가녀린 풀들이 몸을 한껏 벌린다. 애타는 눈길로 바라보던 농부들의 논두렁에 물꼬도 터졌을 테지.

물을 가두듯이 나를 가둬 들인 시간들이 물비늘처럼 어른거린다. 마음의 수심이 저 물 깊이만 할까.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 위태로운 바닥을 드러내던 수많은 시간들에 가슴이 아린다. 떨어지는 빗방울 따라 눈물도 떨어진다. 채워지지 않을 욕망에 몸이 죄인다. 못은 고요하다. 격랑이 없으면서 흐름도 없다. 푸른빛이 번득이는 검이 하늘을 가른다. 땅에 발이 붙어 버린 듯이 꼼짝 할 수가 없다. 섬뜩함에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으나 빗방울은 굵어지지 않았다.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작은 파문이 물위에 그려지며 출렁이는 소리가 들린다. 큰 돌 작은 돌 번갈아 못은 다 받아들인다. 어떤 돌이건 물에서 튕겨지는 것은 없다. 그 속에서 수많은 돌들은 작은 탑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내게 던져진 크고 작은 돌은 아프고 쓰라렸다. 세월이 흘러도 가슴에 던져진 돌은 우두 맞은 자국처럼 남아있다. 못은 흔들림이 없다.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고 증발해 버린다. 사랑도, 이별도 용서도 사람의 일이라 어느 것 하나 순조로움이 없었다. 하나씩 받아들일 때마다 마음은 출렁거렸고 못물이 마르듯이 애간장을 태웠다.

안개비가 흘러내리던 오래 전 이야기. 어머니는 기약 없이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홀시어머니 시집살이가 모질고도 서러워 무명치마를 수도 없이 뒤집어썼더란다. 어린 두자식이 눈에 꿈틀거려 차마 실행에 못 옮겼노라고 이야기하시던 그 못을 나도 바라보고 있다. 한 많은 서러움을 삼켜버린 못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주변의 풍경이 달라졌을 뿐이다. 괴물처럼 늘어선 아파트가 잠겨있고 못 가운데 휘황한 불빛의 분수대가 요란하게 유혹한다. 못 둑길은 사람들의 잦은 발길로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다. 목적도 없이 둑길을 걷다가 비에 미끄러워진 풀잎을 밟았다. 못에 빠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미끄러진 한 발에도 놀란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얼마나 절박했으면 몸을 던질 생각을 했을까. 무섭고 가슴이 빠개지는 듯하다.

멀리서 언뜻언뜻 보이는 찌들이 반딧불이 같다. 고요하고 흔들림 없는 수면을 쳐다보며 먹지도 못할 고기를 낚으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별한 취미의 향유가 아니라 도시의 치열한 전쟁에서 피난처의 방편으로 이곳을 택했으리라. 자욱이 내려앉은 밤안개에 그림같이 앉아있는 그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밤을 잃은 개구리들의 소리가 요란하다. 님 그리워 짝을 찾는 소리일까. 어미 잃은 새끼의 울음일까. 미물도 그들만의 소통의 언어는 있으리라. 밤에 우는 개구리소리가 저리도 애잔하게 들리는 것은 내 마음 탓일 게다.

사랑도, 흘려보내지 못한 눈물도 가슴에 꾹꾹 눌러 담고 잘도 참고 견뎌왔다. 비에 젖은 얼굴을 매만져 본다. 까칠해진 손바닥으로 비벼대니 탄력잃은 피부가 제멋대로 움직인다. 뼛속 저리게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이제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할까. 밤바람이 차가운데도 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식은땀에 등허리가 축축하다. 갱년기증세도 지난듯한데 잊을 만하면 나타난다.

가슴 벅한 비명소리가 밤공기를 가른다. 월척이라도 낚았나보다. 미동도 없이 앉아있던 사람의 동작이 재빠르다. 손끝에 전해오는 짜릿함이 내게도 느껴진다. 건져 올리는 순간의 기쁨에 잠시라도 버거웠던 삶에서 놓여나리. 먹빛 물위에 찌만 내려진 것은 아니었다. 신산해진 세상살이와 부부라도 못 다하는 이야기들을 가슴에 담아두기에 너무 벅차서 찌와 같이 내려놓지 않았을까.

온갖 상념에 붙잡혀 잠 못 들어 뒤척일 때 한 달음에 너에게 달려오고 싶었다. 오늘처럼 너를 찾아오면 넓은 가슴에 안긴 듯이 마음이 편안하다. 신에 엎드려 기도하듯이 바라보며 고단한 삶을 너끈히 안아주는 너를 닮고 싶다. 남들에게 드러낸 적개심과 욕심, 자존심과 오만함 등이 섞인 나의 모습, 왜 사는지조차도 모르며 허둥거리며 사는 한심한 나를 돌아보며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아야겠다. 그 노력이 비록 의미 없는 허상이 될지라로 힘겨웠던 생의 자락을 잡고 나 자신의 가치를 더 이상 평가하지 않으련다.

풀잎에 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실루엣으로 보이는 나무 등에 기대어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아침이면 붉은 해가 떠올라 너를 감싸 안고 간밤에 있던 일을 씻은 듯이 감추리라. 그리하여 긴 세월을 견뎌온 오래된 못의 묵은 이야기들은 하나 둘 잊혀질 것이다. 절절하던 젊은 날의 그리움도, 제풀에 지친 삶도 깊고 깊은 수중에 묻어 내가 곧 못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