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아쓰기 / 엄현옥
열차가 검암역을 출발했다.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서울역을 거치는 KTX 경부선이었다. 아라뱃길의 풍경이 창밖으로 펼쳐질 즈음 통로 반대편 좌석이 소란스러웠다. 볼이 통통한 아이는 안경테 장식이 화려한 할머니가 건네준 휴대전화를 받았다. 통화를 끝내고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엄마가 할머니랑 기차 안에서 받아쓰기 숙제 끝내고 오래요."
기다렸다는 듯 할머니의 문제 출제가 시작되었다.
"1번 요·양·워~언"
할머니 특유의 발음은 아이가 받아 적기에 맞춤한 속도였다. 게다가 한 음절씩 끊어 읽어주니 입 모양을 따라해 보며 쓰기 시작했다.
"2번은 의·료·기~이"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료'는 써본 적이 없다며 뭔지 되묻자, 할머니는 '요'가 아니라 '료'라며 강한 엑센트를 주었다. 아이에게 '료'는 아직 어려운 글자인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아이의 얼굴을 마주보며 입 모양을 재정비했다. 혀를 최선을 다해 굴린 발음을 재차 느리게 들려주었다. 아이는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으로 뭔가를 적었다. 공책을 보던 할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다음을 재촉했다.
3번 '게이트 보올~'
'게'는 멍멍개야? 라는 물음을 시작으로 아이의 질문이 계속되었다. 할머니는 집게 달린 '게'라며 검지와 중지로 집게를 만들어 애써 설명했으나 아이는 쓰기를 멈추고 창틀에 발을 올려놓고 탁자 밑에 떨어진 인형 옷을 줍기도 했다. 출제자와 수험생 간의 미묘한 정적은 공항대교를 달리는 소음으로 무마되었다.
출제를 포기한 할머니는 단잠에 빠졌다. 할머니의 작고 고른 코골이는 열차의 규칙적인 소음과함께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열차가 덜컹이며 소리를 매기면 할머니는 추임새인 양 낮은 코골이로 받아쳤다. 짧은 갈등의 순간이 지나자 아이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놀이에 빠졌으나, 이내 잠이 들었다. 무릎을 내준 할머니와 아이의 낮잠은 평화로웠다. 열차는 어느덧 한강을 지나 서울역에 진입했다.
할머니의 받아쓰기 문제는 그녀의 관심사를 대변했다. 친구 서너 명은 요양원에 있고, 자신의 요통을 다스릴 의료기 하나쯤은 당장 필요할지 모른다. 노인정에서는 게이트볼 대회에 대비한 연습이 시작되었을까. 문제가 7,8번을 넘을 때면 '노인요양보험'이나 '임플란트'도 출제했을 것이다. 아이의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기 중심적인 출제였다.
어디선가 보았던, 낯설지 않은 현상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이 최우선이다. 그것을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상대방이 처한 상황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듣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받아 적고 싶은 것만을 선별하여 적는다.
언제부턴가 정서 상태와 의식의 흐름을 제때에 받아써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근래에 더 했다. 스쳐가는 생각들이 연기처럼 사라지곤 하는 증상이 심해지면서부터다. 자동이체는 통장에 기록 한 줄이라도 남겼으나 뇌가 주관한 의식의 잔재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인간관계도 받아쓰기다. 상대가 던지는 무언의 암시나 불러주는 어휘를 제대로 듣지 못하면 문항을 놓치거나 오답을 내놓는다. 재차 물어서 진의를 파악하지 않으면 오해의 벽을 쌓고, 그 벽을 끝내 허물지 못한 채 지내기도 한다. 반면 받아 써야 하는 상대방의 관심사와는 무관한 주관적인 질문으로 일관한다면 관계의 오류가 발생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내가 받아써야 할 것 천지다. 상대적이지만 직장에서는 직원들의 마음으로 받아쓸 수 있으면 좋은 상사다. 가족의 표정에서 파생되는 것들도 습관처럼 받아쓰게 된다. 글씨로 쓰이지 않지만 행간에 담은 기록도 많다. 오고가는 계절의 경이로움을 받아쓰지 않을 수 없으며 영화가 주는 잔잔한 감동을 외면할 수 없다. 삶이 들려준 내면의 소리와 사물들이 건네는 조곤조곤한 속삭임, 무의식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빼놓고는 글을 쓸 수 없다.
삶은 받아쓰기의 연속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바람결에 들려오는 소리를 받아쓴 것이 자신의 문학이라고 했다. 나는 시간이 전하는 것들을 받아쓰곤 한다. 습관과 고정관념의 굳은 살을 빼면 어제 보았던 대상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바람의 소리, 시간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들이 내 청력을 장악하도록 마음에 가득찬 것들을 비워낸다.
열차는 광명을 벗어나자 비로소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받아쓰기를 포기한 할머니와 손녀의 낮잠도 본 궤도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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