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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3

[좋은수필]푸른 텐트 / 정영숙

푸른 텐트 / 정영숙  

 

 

 

가을비다. 흩날려 쌓인 낙엽이 젖는다. 마땅히 갈 곳 없는 주말은 흐린 날이 한결 좋다. 나지막한 창 밖의 풍경이 일상의 거품을 잠재우고, 여러 날 무엇엔가 씌어 살다가 비로소 땅 위에 정착한 것 같은 날이 비 오는 날이다. 아이들조차 방에서 기척이 없으니 집안이 절간 같다.

뒤꼍 창고에서 한참을 부스럭대던 남편이 잡다한 기물들을 한 아름 가져다 거실에 늘어놓는다. 에어매트에 바람을 채워보고 녹슨 버너며 텐트 막대 따위에 마른걸레질을 한다. 묵은 세간에 거품 겸 잔손질을 해둘 모양이다. 그가 무슨 생각에서 어떤 일을 하려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오래 익숙한 행동반경의 한계랄까. 가령 비가 오는 이런 날, 양푼에다 밀반죽을 시작하면 아내가 멸치국물에 칼국수를 말아 주겠거니 여길 뿐 애써 묻지 않는다. 익히 식성을 알고, 궂은 날 생각나는 음식에 대한 일치된 습성들이 은연 중 말의 무용 상태로 발전한다. 그러나 굳이 발전이랄 수는 없는 게 있다. 이 같은 우리를 보고 자주 방문하던 친구가 어느 날, "니들 부부 싸웠니?" 그랬다. 한데 아무리 오래도록 지켜봐도 늘상 그 타령임을 알자 이즈음엔, "너네 부부 적막해서 어떻게 사냐"며 다시 걱정이다. 싸운 게 결코 아니었다 해명은 수월했는데 무슨 말로 "적막하지 않다는" 는 규명하기란 어렵다. 남에게 그리 비쳐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선 왜 불편하거나 적막하지 않은지 나는 모른다.

치댄 밀반죽을 밀폐용기에 담아놓고 며칠째 읽던 [국화의 칼] (루스 베네딕트의 저서)의 나머지를 읽는다. 역자가 소개한 저자의 촌평 한 구절이 이 별난 제목의 책을 붙들게 한다. 부제는 "일본문화의 틀"이다. 한데 정작 작가 본인은 일본 땅을 단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부분적 체험이나 답사는 전체를 이해하는 방법을 오히려 흐려놓기 십상이다"라고 말한다. 국외자인 한 여인이 가본 적도 없는 한 나라, 한 종족의 속성을 어찌 이렇게도 확실하고 신랄한 필치로 그려낼 수 있는지, 인간 지성이 어떤 묘기를 즐기는 기분으로 활자 속에 빠져든다.

두어 시간 누워 책을 읽다 거실로 나갔다. 비는 줄곧 내리고 집안도 여전히 조용했다. 그러나 그 사이 누워 빈둥거린 잠깐 사이, 거실에는 해괴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1인용 하늘색 텐트가 거실 한켠에 세워져 있는데,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다가가 텐트 속을 들여다보고선 맙소사! 그 안에 남편이 태평스레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모를 일이었다. 기분이 참으로 복잡했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고 믿었던 건 착각이었을까. "부분적 인지는 전체의 이해를 흐른다"는 변은 정설일지 모르지만, 도무지 상상도 못 했던 뜻밖의 장소에서 남편의 잠든 모습은 측은해 보였다. 심심했던 아이가 집 짓던 흙모래 위에서 혼자 잠든 것 같은 이 행위의 어간에서 나는 처음으로 늙어가는 남자의 구체적인 외로움을 본 것 같았다. 이유야 어쨌든 그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사뭇 조심스러운데 별안간 건넌방의 문이 열리며 큰아이가 나온다. 녀석은 나오자마자 제 아버질 발견하고선 버럭 화를 낸다. 처음 있는 일이라 놀랍기는 했을 터다. 그렇더라도 녀석의 언행이 맘에 걸려 아일 나무라고 싶었지만 이내 그만둔다. 어쩌면 딸아이 역시 요즘 부쩍 늙어 보이는 제 아버지의 모습에 속상했는지도 모른다. 바깥의 소요에 잠이 깬 남편이 텐트 밖으로 나와 우두커니 앉아 있다. 꼭 잘못을 저지른 아이 같은 얼굴이다.

물솥을 올려놓고 점심 준비를 한다. 얇게 민 칼국수를 삶아 찬물에 건지고, 채 썬 표고와 애호박 꾸미를 만든 후 더운 장국에 국수를 말았더니 그만 맛나게 한 그릇을 비운다. 그새 비가 멎고 비껴든 햇살이 마음의 풍경들을 일시에 바꿔놓는다. 문득 지갑을 챙겨들며 경동시장엘 가보자고 남편에게 말해 본다. 허투루 그냥 말해 봤을 뿐인데, 얼른 옷을 입고 따라나선다. 이 또한 뜻밖이다. 예전처럼 "남자가 짭질찮게 시장엔 뭣하러 줄래줄래 따라가냐"며 퉁명스레 거절하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복작대는 시장 속으로 섞여들었다. 인파에 묻혀 한참을 걷다 보니 남편이 보이지 않는다. 그인 저만치서 민물고기를 파는 곳의 수족관에 정신이 팔려 있다. 아마도 몇 주째 못 간 낚시터 생각을 하는 것이려니 짐작한다. 이번에는 다슬기 파는 노점상 앞에 그이가 다가가 앉는다. 대접에 든 것은 5.000원이고 작은 보시기에 담은 것은 3.000원이다. 주머니에서 1.000원짜리 셋을 꺼내서 남편은 작은 그릇의 다슬기를 산다. 기껏 가라앉았던 심사가 다시 또 얽힌다. "예까지 와서 겨우 고까짓 걸 사느냐"고 마구 소릴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참는다. 오늘은 종일 이상한 날이다. 거실의 텐트에서부터 계속 주파수가 맞질 않더니 왼종일 헷갈린 채 날이 저문다.

돌아와 아욱에다 들깨를 갈아 넣고 다슬기탕을 끓였다. 물론 그이가 삶은 다슬기 속을 바늘로 파내어 주었고, 탕이 맛있다며 큰 대접 하나를 거뜬히 비웠다. 그러고선 늦도록 주말영화를 보는가 싶더니 방마다 한 바퀴 돌아본 후 천연스레 혼자 텐트 속에 들어가 눕는다. 늘 그래 왔던 듯 아무렇지도 않게,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낮보다 기분이 더 어수선했다. 남편이 잠든 거실의 텐트는 내게 너무 먼 섬 같아 밤새 선잠을 잔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아득한 작은 섬, 물길 저어 가 닿을 수 없는 가뭇한 점 하나가 쓸쓸한 추상으로 망막에 가득하다.

남편에 대해서, 아니 사람에 대해서 내가 무엇을 안다고 믿었을까. 행위는 물론 그의 마음은 천 길 심연이면서도 어렵사리 짚이는 게 있다. 오늘 하루 그는 의외로 행복했을지도 모르는 일, 내 눈에는 잠시 처량맞게 보였어도 어쩌면 남편의 천 막잠이야말로 세상 누구도 맛보지 못한, 아니 그 자신마저도 경험하지 못한 "자기해방"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때로 엉뚱한 꿈을 꾼다. 궤도를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섬에 가고 싶어진다. 잠시 은자 되기를 원했을 남편의 "푸른텐트", 그것은 나 역시 얼마나 오래 동경해 온 하나의 섬인가. 이 밤, 내 집 마루의 푸른 텐트는 그 홀로 아득한 수평선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