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쑥부쟁이 꽃이 되어 / 김주안
강변을 거닐다가 우연히 한 무더기의 야생화를 만난 적이 있다. 무리지어 피어 있는 화사한 모습이 발걸음을 오랫동안 멈추게 하였다. 며칠 뒤에 기어코 몇 뿌리를 캐왔다. 빈 화분에 심었는데 꽃송이가 작은데다 가지도 몇 안 되어서인지 볼품이 없었다.
이내 꽃잎이 지고 대궁마저도 삭아 주저앉았다. 이듬해 가을이었다. 골목을 들어서면서 무심코 담장위에 올려 진 화분을 보게 되었다.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별처럼 생긴 앙증맞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가지를 한껏 늘어뜨리고 있었다. 작년 가을 강변에서 캐온 꽃이었는데 가지 수가 엄청나게 불어나 있었다. 화분을 내려 눈에 잘 띄는 현관 앞에 놓았다.
긴 쑥부쟁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꽃은 꽃 모양이 소박하고 요란하지 않으나 한 가지에 많은 꽃송이가 피어 있어 화사한 자태가 일품이었다. 그 작은 꽃송이에서 뿜어내는 향기가 인근 각처에서 곤충들을 쉴 새 없이 불러들였다. 벌들이 찾아오고 나비가 날아들고 쇠파리까지 덩달아 모여 야단법석이었다. 작고 볼품없는 야생화가 도심 속에서 이렇듯 많은 곤충들을 불러 모으다니 경이로운 일이었다.
거기다가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여간 마음이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모여든 곤충들이 신명나는 몸짓으로 한바탕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추는 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긴 쑥부쟁이 꽃이 무대가 되어 무희들이 등장하면서 공연은 시작되었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엉덩이춤을 추는 수벌, 소리 없이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며 호접무를 하는 나비 한 쌍, 거기에 암벌은 날개로 배경음악을 연주하고 있고 쇠파리 놈도 덩달아 손을 비비면서 손 유희를 거들었다. 멀찌감치 거미줄에 있던 무당거미도 제 집을 흔들며 가락을 맞추는 듯 했다.
나는 관객이 되어 화려하고 역동적이면서 정열적으로 연출되는 곤충들의 춤 동작으로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이면 무대의 막을 내리듯이 꽃잎들은 일제히 오므라들었다. 밤이 되면 그 시기에 또 다른 공연이 우리 집 뜨락에 펼쳐진다. 밤에만 핀다는 야래향이 그 주인공이었다. 야래 향은 그 향기가 천리를 간다고 하여 천리향이라는 또 다른 이름도 갖고 있다. 중국이 원산지라고 하며 가지도 버드나무처럼 잘 휘어지고 잎사귀도 길쭉한 모양이 특별한데가 없다. 꽃도 길쭉하고 자잘하여 볼품없는 것이 긴 쑥부쟁이와 같은데, 그 향이 일품이다.
어제 저녁에는 야래향이 머물고 있는 뜰을 서성이고 있었다. 밤의 정적이 꽃향기에 싸여 더욱 두텁고 감미롭게 느껴졌다.
얼마 후 어디서 날개를 퍼덕이며 나방 한 마리가 어둠 속을 뚫고 날아왔다. 야간 공연을 위해 등장한 밤 무희였던 것이다. 그는 야래향 꽃잎에 앉더니 제일먼저 입술을 더듬으며 입맞춤을 하였다. 잠시 후 둔한 몸짓과 어릿한 날개 짓으로 춤사위를 열어 갔다. 어둠의 정적 속에서 펼쳐지는 소박하면서도 유려한 또 다른 춤은 내 마음을 즐거움으로 빛나게 하였다. 내 마음을 아는 양 방금 감나무에 걸렸던 달빛도 고개를 쏘옥 내밀었다.
이렇듯 며칠 밤낮으로 춤의 향연을 즐기고 있던 어느 날 오후였다. 긴 쑥부쟁이 꽃 사진을 찍고 있는데 이 향연에 참여하려는 듯 어디서 나비 한 마리가 나풀나풀 날아왔다. 꽃 속에 앉으면 그 나비와 함께 찍으려고 사진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꽃에는 앉지 않고 내 어깨위에 살포시 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경계심을 풀고 날개를 열심히 오므렸다 폈다하며 한참을 앉아 춤을 추었다. 이제는 춤을 구경하는 입장만이 아니라 내가 실제 무대가 되는 셈이었다.
나는 정말 긴 쑥부쟁이 꽃이라도 된 양 얼마를 그렇게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내 옷 섶에 꽃 향기가 배어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덧 쑥부쟁이 꽃도 야래향도 지고 말았다. 그리고 모든 만물이 성장의 향연을 마치고 열매를 거두는 깊은 가을이 되었다. 요즘 내 삶에도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향기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벌, 나비를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의 춤을 옷섶에만 향기를 지닐 것이 아니라 삶의 내면 깊숙이 아름다운 향기를 지녀야 할 것이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산마르코 광장에서 / 권민정 (0) | 2017.11.26 |
---|---|
[좋은수필]인생은 산책이다 / 김잠복 (0) | 2017.11.25 |
[좋은수필]은행알 선물 / 임민빈 (0) | 2017.11.23 |
[좋은수필]하산下山 / 한숙희 (0) | 2017.11.22 |
[좋은수필]겨울 산에서 시작하리라 / 이정림 (0) | 2017.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