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르코 광장에서 / 권민정
햇살 좋은, 맑고 화창한 겨울 날씨다. 아침에 배를 타고 베니스로 들어올 때만 해도, 바닷바람이 꽤 차가웠다. 그러나 정오쯤 되자 봄날처럼 따뜻하다. 나는 산마르코 광장 노천카페에 앉아 맑고 푸른 하늘과 따사로운 햇볕을 즐기며 사람들을 구경한다. 막내딸과 함께 하는 이태리 여행길인데, 베니스에 왔다가 뜻하지 않게 서양의 카니발을 구경하게 되었다. 오랜 전통의 유명한 가면축제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왔을까. 광장에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던 그 많던 비둘기들도 이미 쫓겨났다. 우리들 없는 곳이 어찌 산마르코 광장일 수 있느냐고 항변이라도 하듯 몇몇 비둘기들만이 광장을 떠나지 않고 사람들 사이로 날고 있을 뿐이다. 오늘은 축제일 기간 중 마지막 토요일이다. 13일 동안 계속되는 축제는 다음 주 화요일에 끝난다. 주말을 이용해 축제를 즐기려고 유럽 전역에서 몰려온 여행객들로 좁은 골목길은 물론 넓은 광장까지 사람들로 북적인다.
오늘은 날씨가 맑고 바람이 불어서인지 몇 년 전 흐린 날에 보았던 베니스가 아니다. 그때 집과 집 사이 좁은 수로를 흐르던 바닷물은 우중충하고 뿌옜었다. 오늘 바닷물은 맑은 하늘처럼 참 푸르고 깨끗하다. 나는 좁은 수로에 걸쳐있는 작은 다리도 건너보고 미로 같은 길도 걸어보고 싶어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인파에 놀라 아예 광장으로 나왔다. 타인과 몸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서양 사람들이 오늘은 예외인 듯 웃으며 몸을 부딪치며, 걷는다기보다 밀려가고 있었다. 노천카페에서 자리 나기를 기다리며 주위를 서성대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
가방행렬을 몇 시간 앞두고 가장(假裝)한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뜨인다. 가면, 모자, 의상, 모두 그 색깔과 모양이 강렬하고 화려하다. 아름답게 분장한 여인이나, 특이한 의상으로 가장한 사람들이 지나가면 여행객들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사진기를 들이댄다. 중세풍의 귀족으로 분장한 부부,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분장한 연인, 금빛 가면과 망토를 똑같이 입은 일가족, 백설공주가 된 아기들이 즐거워하며 내 앞으로 걸어간다. 오늘은 얌전한 부인이 창녀로, 평범한 직장인이 나폴레옹이 되기도 한다. 왕자나 공주가 되어 잠시나마 자신의 끔을 이루어보기도 하고, 여자가 되고 싶었던 남자가 예쁜 여학생으로, 평범한 여학생이 록스타가 되기도 하는 날이다. 평소에도 가면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늘은 그 욕망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날이다.
카페에 앉아 함께 커피를 마시던 딸아이가 갑자기 없어졌다. 잠시 후 아이는 노점에서 샀다는 얼굴을 반쯤 가리는 깃털 달린 가면을 쓰고 돌아왔다. 모자를 쓰거나 옷으로 치장을 하지도 않았지만 반쪽짜리 가면을 쓴 아이는 이미 가면 뒤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다. 나는 딸아이에게 눈길을 주다가 가변과 옷으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을 다시 본다.
얼굴을 가림으로써 생기는 마음의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담해지고, 인간의 본능에 솔직해지는 사람들. 이때만큼은 신분을 벗어나 모두가 동등해져서, 완전한 자유를 만끽할 것 같았다. 인간적인 욕망을 분출하는 축제가 어둠과 함께 광란의 밤이 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그 즐거움을 위해, 일탈의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가면을 이용해 욕망을 분출하기 카니발에 온 경우도 많을 것이다. 이 카니발은 과거 베니스의 귀족과 평면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즐기기 위한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우리는 여행을 한다. 미지의 새로움을 동경하고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갈망할 때 여행을 생각한다. 베니스를 배경으로 소설을 썼던 토마스 만은 이곳을 동화처럼 환상적인 일탈을 원한다면 여행하기 좋은 도시라고 했다. 그는 베니스를 아첨을 잘 하는, 속내를 알 수 없는 미녀와도 같은 도시, 어쩌면 동화 같고 어쩌면 나그네를 유혹하는 함정 같은 도시라고 했다.
카니발에서 입을 멋진 의상과 쓸 가면을 마련하기 위해 사람들은 오랫동안 돈을 모은다고 한다. 그러나 노점에서 산 싸구려 가면과 우스꽝스러운 모자만으로도 이미 축제의 주인공이 된 젊은이들은, 광장 가운데 설치된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흥겹게 흔들고 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딸아이가 거기로 달려간다. 문득 오월이면 축제를 온 몸으로 즐겼던 젊은 한 때를 떠올리며 내 마음은 어느덧 딸아이와 함께 가면축제의 행력 속으로 흠뻑 빠져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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