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손훈영
오래 그래왔다. 우리 세 식구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한 가지 금기가 있었다. 집안에서 절대로 그릇을 깨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유리그릇은 더 그랬다.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유리 파편들을 보면 피가 식고 온 몸이 굳어 오는 나의 고질병 때문이었다.
그저께는 설거지를 하다 포도주잔을 하나 깼다. 다행히 손은 다치지 않았다. 짤막한 비명과 함께 개수대 앞에 얼어붙은 듯 서있는 나를 보고 남편과 딸이 끔쩍끔쩍 서로 눈길을 교환하며 다가왔다. 혼이 나간 나를 얼른 식탁 의자에 앉히고 아무런 일도 아닌 듯 설렁설렁 유리조각들을 치워주었다.
남편과 딸은 자주 말하곤 했다. 생활 속 위험인자에 대해 내가 지나치게 신경 쓰고 조심한다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거의 강박증 수준이라고 했다. 얼마 전 진도 5.8의 지진으로 온 집안이 한 번 흔들리고 난 뒤 깨질 위험성이 있는 물건들을 미리 다 단속해 두었다. 부엌 한 쪽 오픈 장에 자주 쓰는 그릇들을 쟁여두었는데 그것들을 모두 스테인리스로 바꾸었다. 지진이 왔을 때 그릇들이 그대로 쏟아질 텐데 그 그릇들이 다 유리나 도자기라면? 상상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삣 서는 일이었다. 딸아이가 자는 방 머리맡 위 책장도 다 치웠다. 혹 자다가 지진이 왔을 때 딸애 머리 위로 책들이 쏟아지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비뚤게 걸려있는 수건이나 흐트러진 책꽂이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지만 마음이 편했다. ‘그 물건’은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했다. 지금까지는 그런 과민함을 질서에 대한 감수성이 높다느니 섬세한 성격이라니 하며 오히려 긍정적인 쪽으로 정당화 시켜 왔다. 단지 유비무환적 정신이 강해 위험에 대해 남들보다 더 조심하고 대비하는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짝이 달아나 버린 양말 한 짝과 뚜껑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는 밀폐용기 하나를 든 채 조바심에 떠밀리고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 짝들을 찾아 아귀를 맞출 때까지 다른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초조함이 일었다. 그깟 양말 한 켤레와 밀폐용기 하나가 뭐라고 내 안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느끼다니. 그런 자신이 싫고 이제 그만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M을 만났다. M은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친구다. 삶의 방향과 태도에 있어 높은 점수가 매겨지는 친구다. 문제 해결에 있어 M의 콘크리트 같은 굳건함과 포크레인 같은 저돌성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늘 주저주저 망설이는 나로서는 못내 부러운 부분이다. 나와는 많이 다른 M의 거침없음에 이따금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정리를 해보면 언제나 M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해서 늘 M에게 조언을 구하고 그녀의 단호함과 대범함을 흉내라도 내고 싶어 한다.
차를 마시며 지금까지 M에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강박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박살난 유리 파편에 대한 내 공포심을 듣던 M이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유리가 깨졌을 때 나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단지 귀찮은 일거리로 생각하고 그냥 척척 치워버려.
깨진 유리 파편을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M의 얼굴. 유리파편이 발바닥을 찢고 드는 상상에 실제 고통까지 느낀다는 나를 참 이해할 수 없어하는 M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의 상태가 객관적으로 보여 졌다. M의 얼굴은 이미 그 안에 답을 포함하고 있었다. M이 맞고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상하다는 자각은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놓여나는 시작점이었다. 그 시작은 순간적이었다. 자각이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 갖은 불안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생활 속 속속들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던 그것들이 더 버티지 못하고 내 앞으로 나뒹굴어졌다. 아픈 이가 뽑혀지듯 후련했다.
오랜 시간 가장 가까운 혈육들로부터 심리적 억압을 겪으며 살아왔다. 친정으로부터 들려오는 불협화음 없이 며칠이 흐르면 문득 문득 독사대가리처럼 치솟는 불안을 느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 해결로 고통스럽고, 문제가 일어나지 않으면 곧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하는 불안으로 고통스러웠다. 구체적 고통과 막연한 불안, 이중의 억압에 짓눌렸다. 내 영혼은 불안에 끝없이 잠식당하고 있었다.
마침내 내 발밑에 풀썩 고꾸라져있는 불안들. 불안이 확인되니 그 원인도 밝은 액정화면에 뜨는 공시문처럼 선명해졌다. 불안은 동생의 초점 없는 얼굴을 하고 엄마의 새된 목소리를 하고 아버지의 체념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참 낯익은 것들이었다. 익숙해서 그리 별것도 아닌 것들이었다. 뭉뚱그려 한 배낭에 넣으면 가뿐하게 지지 못할 것도 없을 것들이었다. 작은 배낭 하나가 그토록 막막한 망망대해였다니. 햇빛 속에 환히 드러난 배낭을 발로 툭툭 차보았다. 이것들 때문에 그 긴 시간 엉거주춤 살아왔단 말인가. 뭔지 모르게 마음이 떨려 안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피곤을 감수했다는 말인가.
아직 오지도 않은, 그럴지 안 그럴지도 모르는, 위험 상황을 지레 겁내며 채비를 하는 상태. 신경정신과에서는 이것을 예기 불안이라고 한다. 예기불안.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듣기도 하고 읽기도 했지만 이 단어가 정신과적으로 지금의 나를 정확히 나타내주는 용어라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예기불안증 환자였다. 공황장애까지는 아니지만 그 전조적 증상을 가지고 있던 환자였다.
굴착기로 땅을 파헤치듯 불안의 근본을 파헤쳤어야 했는데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다. 불안이라는 정서가 본질적으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뭐든 한계수위에 도달하면 곧 넘친다는 것은 불안에도 적용됐다. 생활전반을 잡도리하는 불안강박이 출구를 찾게 했다. 다른 출구는 없었다. 내 불안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 밖에는. 글을 쓰면서 불안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홀로 자판을 두드리며 그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양질의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글쓰기는 후유증 없는 신경안정제였다. 안정제가 불안을 완화시켜 주었다.
불안이 명확한 얼굴을 보여 줄 때, 불안으로 인한 강박증이라는 병은 이미 반 이상 치료된다, 실체 없는 불안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실체 없음은 실제로 없어져 버린다. 보면 없어진다. 원인과 결과를 정확히 느끼면 증세는 사라진다. 모든 신경정신과적 문제들이 다 그렇다.
금기는 깨어졌다. 줄탁동시였다. M에게 내 강박증을 토로한 것이 문제 해결의 결정적 단서가 돼주었다. 글쓰기를 통한 오랜 분석과 유리 파편에 대해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M의 얼굴이 맞물리는 순간 마침내 불안이라는 알이 깨졌다. 지금 이후로 또 다시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해도 그것은 단지 심리적 습관의 문제일 뿐, 나는 이제 더 이상 불안과 두려움의 포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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