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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언재 한번 / 이애순

언재 한번 / 이애순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 한번이란 말을 종종 하며 살아간다. ‘언제 한번 밥 한 끼 먹읍시다.’ ‘언제 한번 차 한 잔 합시다.’ ‘언제 한번 술 한 잔 합시다.’ ‘언제 한번 놀러 갈게요.’ 등등 아주 막연한 말이지만 친근한 말이다. 이런 말들은 인사치례로 하는 경우도 많지만, 대인관계를 끈끈하게 이어가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이 언제 한번이란 말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이 있다. 인사치례처럼 뱉는 말이 아니라, 그 말에 대해 언젠가는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때문에 가급적 실천성이 없거나 그렇게 해야 할 관계가 아닐 때는 이 말을 남발하지 않고 살아왔다. 마음에 없는 언제 한번은 공허하기에 안 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부산에서의 신혼생활. 신혼 초 부산에서의 생활은 내 고향의 정서와 달리 당황할 때가 많았고 억센 사투리는 타향살이를 실감나게 했다. 큰아이가 세 살 때 주택에 살았는데,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갔더니 또래의 아이 엄마가 말을 걸어왔다. 이야기를 나누다 자기 집을 알려주며 언제 한번 놀러오라는 것이다. 전화번호를 받고 언제 한번 가겠다며 헤어졌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그 집에 언제 한번놀러가야 하는 일이 숙제가 되었다. 나름 이것저것 생각하고, 이때저때 따지며 그 사람이 방해 받지 않으면서 부담되지 않는 시간을 택하려고 그날을 잡기에 고심했다. 내겐 동네 사람을 사귀는 초례청 같은 일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일 년 동안 살았지만 아는 사람 없이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던 터였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 스스로 나 지신을 고립시켰는지도 모르리.

드디어 그날을 잡았다. 미리 전화를 걸어서 가도 되겠느냐는 동의를 받고, 그 집 아이에게 줄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아무리 옆집이라 하지만 처음 방문하는 집이기에 화장도 하고 옷도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집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니 아이 엄마가 문을 열러주는데 나는 조금 당황했다. 세수도 안한 상태처럼 보이는 얼굴과 아무 치장이 없는 옷차림새.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여자 역시 놀라는 기색이었다. 말끔한 차림에 선물까지 들고 온 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여자와 내가 언제 한번 놀러 오라는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 결과리라. 여자는 편하게 그냥 아무 때나 시간 있으면 놀러 오라는 의미였는데, 나는 그 언제 한번에 격식을 갖추고 관계 형성이라는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렇게 우린 어색한 조우를 했도 그 관계는 계속 이어지지 못했다. ‘언제 한번이라는 풍유적 의미를 너무 현실적으로 해석한 결과리라.

언제 한번이라는 말은 아마도 우리 민족만이 가진 정서의 표출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은 이 막연한 시간의 약속을 아무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산다. 때론 언제 한번을 실천하기도 하지만, 그 말이 공염불로 사라지는 경우가 있어도 문제 삼지 않고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언제 한번이기 때문이다.

언제 한번 밥 한 끼 먹어요.’ 이 말은 사람 사는 세상을 대변하는 정서의 표현이다.

아는 작가 한 분이 다른 말 끝에 언제 한번 국수 한 그릇 먹자는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그 문자의 답에 올해가 가기 전에라는 한정을 둔 답글을 보냈다. 그분의 진심이 읽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올해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기였다. 나는 여러 가지 일로 며칠이 훌쩍 지나가니 내 마음속에 언제 한번에 대한 부담감이 실려 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틀이 남았고 이틀이 동안 다른 일이 생겨 결국 언제 한번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해를 넘기고 말았다. 물론 그 분의 언제 한번은 인사치례였을 수 있다. 문제는 내가 올해 안에라는 답글에 대한 책임감이다. ‘언제 한번올해 안에로 범위를 한정한 데에는 막연한 약속을 못 견디는 내 성격이 작용했으리. 이제는 버리고 싶은 유물이다. 결국 올해 안에 약속을 못 지켜 미안하다는 문자를 끝으로 내 마음에서 그 일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언제 한번이라는 말에 저항이 사라졌다. 꼭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언제 한번은 세상을 향한 소통의 말이다. 실제 약속이 이루어지지 못해도 언제 한번 밥 한 끼 먹자.’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참으로 푸근하고 따뜻한 말이다.

요즘처럼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해야 하는 어수선한 시국에 누군가 전해주는 언제 한번 밥 한 끼 먹자.’는 위로의 말이 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