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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기다림 / 류영택

기다림 / 류영택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다리기가 지겨웠던 것 같다. 아내의 다리에 보호 장구를 채우는 동안, 휠체어 손잡이에 턱을 괸 채 서 있던 딸아이는 어느새 버팀 발에 다리를 꼬며 몸을 흔들고 있었다.

"가자." 문고리를 붙들고 옆으로 비켜섰다.

토라진 듯 양 볼이 부풀어올라있던 딸아이는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빨리 병실을 벗어나고 싶은지 딸아이는 성급히 휠체어를 밀었다.

휠체어를 미느라 고개를 쭉 늘어뜨리고 양팔을 벌린 채 돋움 발을 하고 있는 딸아이의 모습은, 비상을 하기위해 날개 짓을 하는 독수리형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마음 같이 쉽게 밀리지 않았다. 힘을 쓰느라 입술은 앙다문 딸아이의 양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바퀴 좀 돌리주소!" 보다 못해 아내에게 한마디 했다.

넋을 놓은 사람처럼 앉아있던 아내가 그제야 양 바퀴에 손을 갖다 댔다.

"여보, 움직이지 않는데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휠체어를 밀던 딸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바퀴가 잠겨 있잖아!" 양 손을 허리에 붙이고 씩씩거렸다. 그것도 모르고 여태까지 힘을 쓴 게 억울했던 모양이다. 레버를 만지작거리던 아내가 무심결에 브레이크를 채워버린 것 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났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아내도, 밀고 있는 딸아이도 이제 막 운전면허증을 딴 왕초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는 잠시 전 했던 동작으로 휠체어를 밀었다. 꿈틀하던 바퀴가 스르르 구르기 시작했다.

휠체어가 앞으로 나아가자 딸아이는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딸아이의 머리와 아내의 머리가 줄을 선 것처럼 일직선이 되었다. 앞을 가린 제 엄마의 머리를 피하느라 아이는 머리를 삐딱하게 재꼈다.

고개를 옆으로 뺀 채 휠체어를 밀고 있는 딸아이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가!" 여차하면 브레이크를 밟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 운전학원선생처럼, 손만 뻗으면 휠체어를 잡을 수 있게 성큼 성큼 바싹 뒤를 따랐다.

신이 나는지 아이의 걸음걸이가 더 빨라졌다. 가속도가 붙자 아내의 상채가 등받이에 밀착되고 보호대를 한 다리가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순간 앞을 향해 나아가는 아내의 아픈 다리가 쿵 하고 성문을 들이박는 충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너무 빠르다 싶었던지 양쪽 바퀴에 손바닥을 갖다 대며 소리를 질렀다.

"수정아, 살살 밀어!” 휠체어를 밀고 있는 딸아이를 향해 내지르는 아내의 목소리가 마치 와아! 하고 충차를 밀고 성문으로 돌진하는 병사들의 함성소리처럼 들려왔다.

돌격 앞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힘차게 달려왔건만, 성문에 빗장이 걸리듯 야속하게도 문이 닫히고 말았다. 6 5 F 3아래로 내려갔다.

아내는 역으로 바뀌는 엘리베이터의 숫자판을 바라보느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딸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 닫힌 문을 들이 받을 듯 휠체어를 앞으로 밀었다 다시 제자리로 당기기를 반복했다. 두 사람의 모습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며 나는 시계추처럼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복도좌우로 걸음을 옮겼다.

종횡무진, 문득 그 말을 떠올리니 웃음이 났다. 나는 횡으로 복도를 배회하고, 딸아이는 휠체어를 종으로 밀고 당기고, 휠체어를 밀고 당길 때마다 치켜든 아내의 고개도 덩달아 아래위로 움직였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왼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수정이는 휠체어를 앞으로 밀고, 다시 오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몸 쪽으로 당겼다. 톱니바퀴 돌아가듯, 아내와 나 딸아이는 어떤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듯 동작이 일치했다.

세 사람의 동작 같이 엘리베이터도 그렇게 움직여 줬으면 좋으련만, 숫자판은 오랫동안 한곳에 불을 밝힌 채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아내의 손가락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다섯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기를 반복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조바심이 나고 사타구니가 마려워 왔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잠시 머물고는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B1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치켜든 아내의 어깨가 너울에 묻힌 작은 배처럼 휠체어에 묻혔다. '이러다 명()짧은 사람 숨넘어가지' 뚜벅뚜벅 저만치 걸어갔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자 휠체어 묻혔던 아내의 어깨가 제자리에 와 있었다.

1더하기 23. 역시 숫자는 역으로보다 작은 숫자에서 큰 숫자로 옮겨 가는 게 덜 지겹게 느껴지는가 보다. 같은 걸음걸이지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복도를 배회하던 내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고, 목을 치켜든 아내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도착할 때가 됐는데. 바닥만 바라보던 딸아이도 고개를 들었다.

우리 세 사람, 행동은 달랐지만 마음은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빨리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제각각 서로 다른 동작을 되풀이하면서도 아내도 딸아이도 나처럼 탈출을 꿈꾸며 벽을 허물고 있었을 것이다.

'딩동'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들려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기까지 수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마지막 관문을 남겨놓고 기다리고 있는 이 순간은 아내가 이곳에 입원해 있었던 시간보다 더 길게만 느껴졌다.

'반쪽외출' 병원에 와서 처음 맞이하는 아내의 바깥나들이,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앞으로도 엘리베이터 앞에 설 때면 일분이 여삼추 같아, 오늘과 같은 동작을 반복할 것이다.

홀가분하게, 언젠가 병실 침대 밑에 홀로 남겨진 아내의 신발이 함께 외출하는 날, 그날이 진정한 가족나들이가 되지 않을까. 그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