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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엉덩이 유감 / 조이섭

엉덩이 유감 / 조이섭



 

샤워를 하고 거울 앞에서 알몸을 비추었다. 아직은 쓸 만하다고 나르시시즘에 잠깐 취하다 말고 무심코 엉덩이에 눈길이 갔다. 아니, 이럴 수가. 엉덩이 아랫부분에 가로로 줄이 하나 쩍 그어져 있었다. 엉덩이와 허벅지 연결 부분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겹친 것이었다. 손으로 만져 보니 골이 제법 깊었다. 누구에게 들킬까 봐 얼른 팬티를 주워 입었다.

거실에서 차 한 잔 마실 때도 거울에 비친 엉덩이 주름이 자꾸 어른거렸다. 마침, 텔레비젼에서는 생로병사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우리 몸의 전체 근육 중에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이 칠할 내지 팔 할이라고 했다. 엉덩이 모양을 사과형, 식빵형, 하마형, 오리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알록달록한 그림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운동과 마사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프로그램 마칠 때 즈음에 엉덩이 근육을 올리는 맞춤 체조 시범을 유심히 보았다. 옳지, 저 체조라도 열심히 해서 엉덩이에 생긴 주름을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스커트부터 했다. 전에도 가끔 하던 운동이었지만, 엉덩이와 허벅지에 잔뜩 신경을 써가며 동작을 정확히 하려고 애썼다. 매트를 깔고 똑바로 누운 다음, 두 팔로 골반을 들어 올린 자세에서 다리를 교대로 쭉 펴 올렸다. 무릎을 세우고 엎드려서 다리를 한쪽씩 들어 올렸다. 식탁 의자를 잡고, 뒤쪽으로 한 다리씩 들어 균형을 잡고 버티기도 했다. 평소와 달리 열심히 운동하는 나를 보고 아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엉덩이 다듬는 체조에 열중인 것을 본 아내는 무언가 심상찮았는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내가 가로줄 이야기를 했더니 이 양반아, 당신 엉덩이에 금 간 게 어제오늘인 줄 아나? 십 년도 더 됐다.라며 눈을 흘겼다. 집에서 보기 흉하게 그러지 말고 앞산이나 한 바퀴 돌아오라며 애처로운 눈길을 보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요즘 손녀 보느라 운동을 소홀히 해서 주름이 생겼노라고 우겨보았지만, 나보다 내 엉덩이를 더 많이 본 아내 말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오늘 아침, 큰아들이 목욕을 같이 가자고 연락이 왔다. 공중목욕탕의 탈의하고 몸 말리는 공간에서는 벗은 몸을 많이 보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달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난질이다. 청년들의 사과 같은 엉덩이는 그것이 곧 젊음이고 청춘이다. 중년에 접어든 이들은 이른바 가로 선이 보이기 시작하고, 노인들의 엉덩이는 살이 빠져 쭈글쭈글하고 주름이 두 겹 세 겹 접혀있다.

내가 발가벗은 사람들을 힐끔거리고 보고 있으니,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 녀석이 뭘 그리 두리번거리느냐고 핀잔이다. 물기를 닦는 척하며 슬그머니 거을 속의 내 엉덩이를 보니 그동안 운동한 효과인지 먼젓번보다 한결 나아 보인다. 그보다 더 위안이 되는 것은 나보다 나이가 적어 보이는 중년 아저씨들 엉덩이에도 선명한 주름이 제법 많이 보인다는 점이다.

억지 위안은 잠시뿐이고 탄생, 성장, 퇴화, 소멸하는 순환의 이치를 누구인들 피해갈 수 있을까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든다. 노화라는 것이 결국 엄마 자궁에서 나올 때의 쪼글쪼글했던 아기의 피부가 유아기, 청년기를 거치며 팽창했다가 노년에 이르면 다시 쭈글쭈글하게 되돌아가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그뿐이랴. 시력만 해도 신생아일 때는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고 코앞의 엄마 얼굴도 윤곽만 겨우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천리안이 부럽지 않은 청춘을 지나면 백내장, 녹내장으로 눈이 침침해지다가 시력을 잃기까지 한다. 늙어 갈수록 키는 줄어들고, 뼈도 약해진다. 돌 즈음에 배웠던 걸음마조차 못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자연의 섭리인 것을 어쩌랴.

사람도 나이가 들면 나뭇잎처럼 제 모양 그대로, 싱싱한 채로, 단풍만 예쁘게 들어 한순간에 떨켜를 떠나 팔랑거리며 땅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고 자랐던 과정의 역순으로 하나씩 되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아련하기만 하다.

한창 젊었을 때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나이를 먹어서도 어느 정도 젊음을 유지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름진 음식보다 소박한 나물과 채소를 즐기고, 과음을 삼가야 할 것 같다. 아울러 운동을 꾸준히 하다 보면 요양원 신세를 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신체적 변화에만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쓸데없는 욕심은 내려두고 편안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자연에 동화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맑은 정신으로 손주들 재롱이나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식들에게 지청구나 듣는 질척거리는 존재가 아니 되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누구에게 보여 주며 자랑할 일이야 없겠지만, 이참에 부지런히 운동해서 사과 같은 엉덩이를 한번 만들어 보아야겠다. 그렇다고 지금의 내 엉덩이가 조선 숟가락 엎어놓은 것처럼 형편없다는 말은 아니다. 아직 양식당에서 쓰는 스푼 정도는 된다. 하지만, 그걸 확인하려고 손을 내밀지는 마시라. 손대지 말 것. (觸手 嚴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