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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크리스마스 선물 / 박헌규

크리스마스 선물 / 박헌규

 

    

 

! 신문 던지는 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깨운다. 황급히 사리지는 발자국 소리를 따라 여느 때와 같이 현관문을 반쯤 밀었다. 세밑에선 새벽 찬기가 얼굴을 확 덮친다. 신문을 집어 든 내 상체 일부분을 문 안으로 선뜻 거둬들이지 못한다. 두어 뼘 거리에 여미하게 포장된 종이상자 하나가 나의 시선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인기척을 찾아 고개를 길게 내밀었다. 어둠이 머물던 곳곳에 희붐함만이 밀려들 뿐 아무도 없다.

상자를 집어 들었다. 손에 잡힌 모양새, 무게가 전해주는 느낌으로 봐서 상자 속 내용물이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견물생심, 내 집 앞에 있으니 내 것이 분명할 터. 순간 욕망이 나의 얕은 분별심을 지워버린다. 조심스럽게 상자 속을 들여다보니 예견대로 롤 케이크 두 개가 얌전히 누워있다. 가지런한 모습이 평온해 보인다. 이른 새벽에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상자 속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귀퉁이에 아기 손바닥만 한 노란색 메모지가 보인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이름도 성()도 없다. 간밤에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간 것일까. 유년시절 그렇게도 많이 기다리던 빨간 고깔모자에 하얀 수염을 단 산타할아버지가. 피식 웃음이 나온다. 20여 년 전의 사건이 떠올랐다.

우리 집 큰딸, 여름이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매년 성탄 이브이면 산타가 되었다.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미리 준비하여 잠든 시간 몰래 머리맡에 두곤 했었다. 그러면 자기가 바라던 것을 산타할아버지에게 얻었다며 만족해하고 좋아했었다. 산타할아버지는 제가 원하는 것, 마음까지 알아맞힌다며 신기해하면서도 한없이 행복해했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잠든 줄 알고 선물을 들고 들어갔다가 자지 않고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에게 들키고 말았다. 당황한 나머지 급하게 둘러댄 말이 골목길에서 산타할아버지가 우리 집을 찾기에 내가 대신 전해주겠다며 받아서 왔다고 해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이렇듯 내 나름, 주도면밀하다고 믿었던 산타 역할도 아주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들의 성장 앞에 후유증을 동반한 채 무너지고 말았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해이다. 크리스마스 날 우리 집에 아이 친구들 서너 명이 놀러 왔었다. 신명나게 놀던 아이들이 얼마 후 다투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사건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나였다.

문제는 산타할아버지가 실제 있느냐, 없느냐, 존재 여부였다. 우리 집 아이가 간밤에 얻은 선물, 곰 인형을 산타할아버지가 주고 간 것이라고 자랑했더니 친구들이 일제히 웃으며 이 바보야, 산타할아버지가 어디 있어?” 하고 반박했다. “왜 없어?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 집에 오시는데. 그리고 이봐 어젯밤에도 나에게 선물을 주시고 갔잖아.”

얼마 동안 저네들끼리 옥신각신하더니 급기야 사건의 불똥이 내게로 번졌다. 딸은 시시비비를 가릴 판결관으로 나를 지목하고 아빠에게 물어보자며 인형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내 방으로 왔다. 어린아이들 앞에서 내가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을 이 아이 저 아이 얼굴만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판결관이 아니고,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난감하다 못해 창피하기까지 했다.

결국, 황희 정승의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일화로 얼버무리며, 분쟁은 일단 잠을 재웠지만 더 큰 일은 뒤에 있었다. 아이들이 돌아간 뒤, 딸아이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지금까지 받은 선물은 엄마 아빠가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얘기를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가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엄마 아빠가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면서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달래느라 몇 날 며칠 애를 먹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내 가슴 한켠에는 아직도 그 아이들 모습들이 깊이 새겨져 있다. 내 얘기를 듣고 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 순진무구한 표정들, 지금 헤아려보니 다들 삼십 대 중반이 되었을 나이이다. 아마 지금쯤은 그들도 내 마음을 이해하리라.

그저께는 두 아이 엄마가 된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그 옛날 아빠에게 꼴딱 속았던 산타할아버지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제가 옛날 아빠같이 산타가 된다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안방에서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웠다. “여보, 여보! 간밤에 산타할아버지가 다녀간 모양이네!” 잠시 나이를 잊고 호들갑을 떨었다. 단잠을 깨운다는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아니다. 아내는 선물이 뭐에요?” 하고 묻는다. 아이나 어른이나 크리스마스 선물은 싫지 않은 모양이다. 아내와 나는 빵을 한 조각씩 떼어 입에 넣었다. 고맙게도 누가 두고 갔을까? 상자 속에 들어있던 메모지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다.

곧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는 듯 아내는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맞아 그 집일 거야. 예감이 틀림없다며 입을 떼었다. 멀지 않은 곳, 우리 집과 대문을 마주 하고 있는 이 장로님댁이라고 했다. 그제야 나도 동감이 갔다. 오 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오던 첫해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직접 건네받았기에 오늘같이 우리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골똘히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입안에 든 빵조각이 목구멍을 넘는데 더디다. 성탄절은 해미다 있었지만 나는 이웃에 작은 사탕 한 알 나눈 적이 없다. 얻어먹기만 하는 얌통머리 없는 짓만 하고 살았는데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이웃 간에 정 나누고 기쁨을 주는데, 믿음 다른 것이 무슨 이유가 되겠는가. 다음 성탄절에는 내가 먼저 산타할아버지가 되어 그 집 앞을 찾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