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의 미소 / 김기자
작년에도 그 자리였다. 어느 바람에 실려와 뿌리를 내렸는지 하수도 맨홀 뚜껑 옆에 비스듬히 앉아서 그곳이 옥토인양 편해 보인다. 예전 같았으면 잡초라는 생각에 뽑아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용기를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한적한 곳이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이렇게 편치 못한 곳에 자리를 잡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활짝 웃고 있는 모습에서 묘할 만큼 신비감이 넘쳐흐른다. 지날 때마다 눈길이 자꾸만 끌리는 것은 어쩌면 꽃 속에서 나를 찾는 기분이 들어서다.
늦은 시각, 가게를 정리하고 다시 그곳을 지난다. 민들레꽃은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니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꽃송이가 잎을 앙다문 자세를 하고 있다. 차가운 밤공기가 두려웠나 보다. 놀랍게도 작은 식물들까지 제 몸을 지키는 지혜가 있었다. 또다시 꽃피워야 할 내일을 위해 어두움을 이겨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튿날도 민들레를 향하여 눈을 맞춘다. 노란색이 평화롭다. 햇살이 시작되면서부터 여전히 활기찬 얼굴로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작은 경이로움이었다. 많은 날들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만 같은 민들레를 보며 지나온 내 삶을 반추한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외로움에 항상 기대어 살아온 것 같다. 나는 막내로 태어났고 말을 익히기도 전에 엄마가 세상을 뜨셨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큰언니가 있었지만 어디 엄마의 사랑과 비교가 되기나 했을까 하는 짐작을 한다. 그만큼 어린 나로서는 성장과정이 순탄치가 못했다. 식물이 필요로 하는 바람과 공기처럼 지금껏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은 엄마의 사랑이었음을 고백한다. 남들과 다르게 느껴야만 했던 사람의 갈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어쩔 수 없이 장사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등짐이 무거워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수월치 못했던 생활 속에서 부러지거나 뽑히지 않아야 했다. 아내노릇 엄마노릇 하며 아등바등 그저 충실히 사는 게 내 몫인 줄 알았다. 흘러간 세월 속에서 곰삭은 맛이 나듯 여유로움을 찾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제는 작은 꽃에서조차 평화를 느낄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선물로 받는다. 민들레와 말을 나눌 수는 없지만, 이렇듯 나에게 이색적으로 다가오니 고마울 뿐이다.
누군들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 있겠는가. 꽃씨가 옥토에 떨어짐과 같이 그만큼 살아가는 조건이 남보다 수월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척박한 곳에 남겨진 작은 씨앗에 불과했다. 그래도 뿌리를 안전하게 잘 내리며 지나온 날들인 것 같다. 그것은 분명 내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으리라. 나를 돌보아야 했던 주변의 가족이 아니었으면 가능치 못했으리라. 그동안 고단하게 느껴야 했던 삶의 순간순간들도 오히려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쯤으로 생각하고 싶다.
민들레의 웃는 얼굴이 정겹다. 붐이면 지천으로 흔하게 피어나서 기품을 품기며 당당하기까지 하다. 낮이면 양지쪽을 향해 꽃잎을 활짝 열고 있는데 그 모습은 온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부러울 게 없어 보인다. 넉넉함까지 지니고 있다. 누구의 주목과 갈채를 받지 못할지라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모습에서 대단한 끈기를 엿보게 한 기회였다.
오늘도 민들레꽃은 여전하다. 길가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이겨내고서도 곱기가 그지없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나 아닌 열심히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꽃잎에 투영되고 있다. 힘들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모습일지라도 그 영혼의 세계가 무한할 만큼 신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민들레가 새삼스러울 만큼 의연하고 귀하게 보인다. 이런 생각은 저만큼 낮은 곳에서도 마음먹기에 따라 충분한 평화가 피어날 수 있는 까닭이다.
며칠이 지나갔다. 햇빛이 더 높아지던 날 특별한 관심이 쏠렸다. 어느덧 몇 송이의 꽃이 하얀 솜털로 작은 원을 매단 채 흔들리고 있었다. 꽃이 마련해낸 넓은 우주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더 큰 세상 속으로 바람을 이용해 씨앗을 날리려나 보다. 옥토에 떨어져 싹을 틔울지, 아니면 길가에 떨어져 강하게 생명을 이어갈지 염려스럽다. 제 몸을 지금껏 잘 지켜온 것처럼 어느 곳에 떨어진다 해도 강하면서 고운 자태에 변함이 없었으면 좋겠다. 민들레 씨의 역할과 적재적소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역할이 대비되는 순간이다.
낮게 쏟아지는 햇살이 투명하다. 빛 아래서 주변을 돌아보니 세상이 한층 따뜻하게 다가온다. 참 다행스런 일이다. 잔잔해져 가는 마음 탓인지 몰라도 지나온 날들이 비옥한 땅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제는 내 삶의 자리가 옥토인양 편하게 느껴진다. 내게서 뻗어나간 새로운 줄기,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산다는 것이 민들레의 영토가 아니겠는가. 오래 참아온 시간이 그런 마음을 선물로 가져다 준 것 같다. 민들레꽃에서 웃는 내 얼굴이 보인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그 여인의 눈빛 / 이정림 (0) | 2018.03.17 |
---|---|
[좋은수필]달밤 / 최현숙 (0) | 2018.03.16 |
[좋은수필]평범한 것이 소중하다 / 강천 (0) | 2018.03.14 |
[좋은수필]크리스마스 선물 / 박헌규 (0) | 2018.03.13 |
[좋은수필]동백꽃 위에 서설은 내리고 / 박찬란 (0) | 2018.03.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