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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동정 / 계용묵

동정 / 계용묵


 

 

어느 과자점에서다.

17,8세의 고학생이 책을 한아름 안고 들어오더니, 문 안에서부터 차례로 손님 앞마다 걸음을 세우고는 모자를 벗고, 그리고 예()를 하고 책을 쭉 펴놓고 학생증을 내보이며 판에 박은 듯이,

고학생입니다. 한 권만 팔아주세요.”

하고 애원을 한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응하지 않는다. 나도 응하지 않았다. 볼 만한 책이 없었다. 볼 것 없는 책을 돈 주고 사서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필요 없으니 딴 데 가보시오.”

나 역시 같은 말로 응대하는 아량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입맛이 쓴 듯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떡하고 물러난 학생은 다음 순서인 내 옆좌석으로 돌아선다.

거기엔 스물한둘 가량의 양장한 여인이 열두세 살쯤의 자기 동생인 듯한, 그렇게밖에 안 보이는 어린 여자와 마주 앉아 아이스크림에다가 생과자를 찍어 먹고 있었다.

책이요?”

하고, 그 여인은 학생이 펼쳐 놓은 책을 보려고도 아니하고, 고개를 들어 실내를 한바퀴 쭉 살피더니,

여기 앉아요.”

하고, 자기 뒤 빈 좌석에 그 학생을 앉히고, 불쑥 일어서서 과자 진열대로 나가더니 먼저 돈을 치르고 아이스크림 한 그릇에 구리만두 한 개를 손수 가져다 학생 앞에 놓으며,

다니기 더울 텐데 좀 요기나 해서 가요, ?”

앉으라니 멋모르고 앉았다가 이 의외의 환대에 놀라는 듯이 학생은 냉큼 일어서며,

아니예요!”

어서 앉아요. 앉아서 먹고, 책은 다른 데 가서 팔면 되잖아요.”

좌석의 눈도 둥그레졌다.

10여 인 손님이 하나같이 거절해오는 이 고학생을 이 젊은 여인이 유독 이렇게도 동정을 베푸는 것이다.

내 시선도 그리로 쏠렸다. 아니 놀랄 수 없었던 것이다.

구걸하는 거지의 애원에 이것밖에 가진 것이 없다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투르게네프의 그것과는 다르다. 학생은 책을 팔아주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거기서 얻어지는 할인으로 학비를 얻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 줄을 그 여인도 설마 모를 것이 아니련만, 책을 팔아주지 아니하고 아이스크림을 대접하는 환대를 베푼다. 책도 비싼 것이 아니었다. 대게가 7, 80원짜리 만화요, 가장 고가(高價)인 듯하게 보이는 것이 120원짜리 유관순전이었다. 아이스크림 한 잔에 80, 구리만두 한 개에 30, 그 값이 110원이면, 80원짜리 만화를 한 권을 팔아주는 것이 도리어 이로웠다. 학생의 원은 원대로 들어주면서도 이로운 책은 아니 팔아주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구태여 아이스크림을 사서 대접하는 이 여인의 심리는 과연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사서 볼 만한 책이 없으면 아이스크림 대신에 현금으로 주는 편이 이 학생으로선 보다 더 긴요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건 결국 그 고학생을 위한 동정에서라기보다 자기 자신의 향락을 만족시키기 위한 동정에서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밥이 없어 허덕이는 친구에게 단돈 10원의 청은 막무가내로 거역하면서도 담배 한 대, 술 한 잔은 싫대도 부득부득 권하는 속세 인정과 조금인들 다를 것이 무엇이랴. 동정이라는 것이 흔히 상대방을 위해서보다 자기 자신의 명예나 자존심을 위해서 베풀어지듯이, 이 여인의 동정도 이런 예에서 조금도 벗어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그 학생이 아이스크림을 받아서 먹기는 먹으면서도 그 대신에 이것이 현금이었으면 하고 마음 아쉽게 여겼다면, 이 여인의 모처럼의 동정은 아무런 의의도 지닌 것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나는 그 여인이 다시 한 번 더 쳐다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