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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시간의 빈터에서 / 김열규

시간의 빈터에서 / 김열규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물살, 그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도둑처럼 가만가만 다가와서는 불차처럼 소란하고 아찔하게 달아나버리는 시간, 가까이 오는 그 앞모습은 늘 백지장 같은데, 되돌아설 때는 온통 하고많은 사연들을 누더기처럼 펄럭이며 가는 시간.

나는 한 번도 시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다만 뒷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그것도 잡으면 잡힐 그런 뒷모습이 아니었다. 까마득한 길 끝에서 먼지처럼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먼빛으로 보았을 뿐이다. 아니, 보았다고 생각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별달리 가파를 것 없이 그저 밋밋한 일들에만 밀려가는 생활이 지탱될 경우의 시간이란 것을 알았다. 사태가 달라지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모반자(謀叛者)의 근성을 드러내던 시간. 그 무서운 곳에 맞닥뜨리면서 나는 가까스로 그 녀석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한밤중 불시에 급한 환자가 생겼을 때 시간은 흡사 달아오른 가마솥의 콩알처럼 튀고 있었다.

붉은 피가 끝도 없이 환자의 옷을 적시고 있을 때, 시간은 따가운 칼부리를 내 정수리에다 들이댔다.

무섭게 나를 다그쳤으나 나는 콩알처럼 튈 수도 없었고, 칼날처럼 예민할 수도 민첩할 수도 없었다. 꼭 찧다 만 메줏덩이, 아니면 녹슬고 부러진 쇠막대기, 고작해서 그게 내 꼴이었다. 그러기에 시간에다 대고 이를 갈 수도 치를 떨 수도 없었다.

흐르는 피가 더해갈수록 시간은 급류가 되어 달아나고 있었다. 나는 달아나는 시간의 급류 속에서 허우적거릴 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럴 때, 나는 시간을 소유하기는커녕 주어진 시간이 있다고 해도 그걸 수용할 수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고 넋을 잃었다. 내게 내 몫만큼의 시간이 없는데, 내 두 주먹으로 괼 시간이 없는데, 내 인생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환자의 생()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인생이란 시간의 홍수 속에 놓여진 실오라기에 불과하다고 해도 우리에겐 그만한 것조차 없다는 생각이 옥죄고 들었다.

인생이란 시간의 여울에 건넨 몇 토막 돌조각의 징검다리, 한데 우리의 다리에는 돌 한 조각이 없었다.

환자의 피는 어느새 이불 하나에 가득 괴고 있었다. 시간이 총알 같은 소리를 내며 벽을 뚫고 덤볐다. 소름끼치는 쇳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져 갔다. 그럴 때마다 펑펑 피가 쏟아졌다.

환자의 육신 어느 부분을 갈기갈기 짓찢어대는 시간, 그런데도 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 데나 허공에다 못을 박고 붙들어둘 시간이 있어야 했다. 한데도 시간이란 놈이 거꾸로 내 목을 매달아 허공에다 늘어뜨리려 들었다. 나는 그놈이나마 붙들어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마음으로 수없이 망치질을 했다.

내일, 내일은 무더기로 상처 난 멧돼지처럼 달아나도 좋다.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정말 안 돼. 단 한 치도 움직여선 안 돼, 나는 그렇게 소리쳤다.

시간아, 네가 목숨이야.

시간아, 네가 운명이야.

구급차에 환자를 실었을 때, 나는 차가 시간을 몇백 몇천 곱절 앞질러 달리기를 빌었다. 시간은 황소걸음을 치고, 차는 화살처럼 내 닫는 환상에 모든 것을 걸었다. 믿어본 적이 없는 신()에게 기대듯 나는 그 환상에 나를 바쳤다. 귀의(歸依)라는 것, 신심(信心)이라는 것, 그게 시간 말고는 없을 것 같았다.

칠흑의 어둠에 헤드라이트가 던지는 불빛, 그것이 거리를 환히 비추는데도 시간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어둠 속에 깊이 몸을 숨기고 없었다. 미치지도 못할 시간의 뒤를 쫓고 있는 차소리. 그 헛된 소리에 견디지 못해 나는 혀를 물었다.

환자를 응급실에 들여보내고 의자에 걸터앉았을 때, 나는 무릎 위에 두 주먹을 괴었다. 시간을 휘어잡을 공허한 몸부림이었을까.

나는 벌떨 일어섰다. 그리고 자꾸 뒷걸음질을 쳤다. 다가오는 시간을 밀어붙일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그러고 싶었다.

다시 주저앉았을 때, 나는 시간을 깔아뭉개듯 오금에 힘을 주었다. 텅빈 환자 대기실, 빈 의자들만이 즐비한 그 공간에 나는 시간을 모셔다 앉혀야 했다. 온방 가득 숨이 막힐 지경으로 시간을 가득 채워야 했다. 그리고 나는 문간을 막아섰다.

피가 거꾸로 흐르는 기척. 아아 시간아, 너도 거꾸로 거꾸로 흐르는가. 제발 내 피 따라 거꾸로만 흘러다오. 하지만 커다란 벽시계의 검은 초침이 모든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것은 미친 듯 돌아가고 있었다. 피를 펑펑 쏟는 환자의 영상이 겹쳐서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이 간다고들 했다. 하지만 내겐 올 시간도 갈 시간도 없었다. 도시 시간이란 없는 것이었다.

종종걸음으로 응급실을 드나드는 의사와 간호사들. 그들이 문을 열고 나설 때마다 하다못해 그 발길에 채여서 구르는 시간이 휴지쪽처럼 구겨지는 것을 보아낼 수가 없어 눈을 감기는 또 몇 번이었을까.

시간아, 네가 덫이라도 좋고 함정이라도 좋다. 여기에 고여 있어라. 마음속으로 웅덩이를 팠었다.

하지만 지금은 태풍일과(颱風一過). 모든 게 고요하다. 얼마 전 퇴원한 환자의 볼에 핏기가 돌고 그 위에서 아침 햇살이 윤기를 더하고 있다.

지금도 그 밤을 생각하면 시간은 단숨에 내 넋을 휘저으며 소용돌이를 친다.

지금쯤 올해가 저물고 있는가. 하지만 한 해가 간 것이 아니다. 수백 수천 년이 휩쓸고 지나간 시간을 가다리기로 하자. 시간의 빈터에서 나는 환자의 회생과 함께 다시 움틀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