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좋아서 떠나는 사람 / 박순녀
“어디엔가 가고 싶다.”
“다음 주말엔 그 갈밭 있는 곳으로 꼭 갈 거야.”
요즘 이런 소리들을 많이 듣는다.
“하늘이 너무너무 좋아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요.”
이런 호소도 또 듣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어디엔가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단풍이 좋을 거라 해서 산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동해의 굽이치는 바다가 보고 싶다면서 바다로 가는 사람도 있다. 친구와 더불어 가는 사람도 있고, 훌쩍 혼자 떠나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가을이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면서 떠난다.
그러나 그들은 가을만 견디지 못해했을까. 아니다. 눈 오는 겨울엔 설경에 빨려든 듯이 또 떠나곤 했다. 봄에도 역시 마음의 눈이 사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이 자기를 지탱하지 못해서 그들은 떠나곤 했다. 몸은 떠나지 못해도 그들의 마음은 항상 떠났다.
나는 이 떠나는 일을 썩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내 마음은 항상 떠나는 것을 갈망했다.
어려서는 늘 큰 도시로 가고 싶었다. 그 미지의 속에서 보다 큰 것을 잡고 싶었다. 내가 가진 것은 항상 작고, 내가 모르는 곳에 보다 큰 것이 있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 나를 큰 도시로 보내주세요!”
봄비가 치덕치덕 오는 날 밤, 나는 서울의 비에 운다는 그런 가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큰 도시를 동경했다. 이것이 비단 나만의 일이었을까.
조그만 행복을 소중히 알라는 뜻을 지금 나는 안다. 행복이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나는 안다. 그것은 저 산 너머 또 더 멀리에 있는 게 아니고, 내 가슴속에 있다는 것도 세월과 함께, 나는 알게 됐다. 그것을 알기까지는 퍽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것도 아는데,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하늘이 너무너무 좋아서 가만있을 수가 없어요.”
하는 말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인 것이다. 어디로 떠난다고,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 채워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철없는 아가씨들과 매한가지로 지금도 역시 떠나고 싶은 것이다. 무엇인가 찾아서 떠나고 싶은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찾고, 남자가 여자를 찾는 것도,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떠나지 않을 수 없어서 떠나는 계절처럼, 나 속에 정착할 수 없어서 떠나버리는 여정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분명 사람은 떠나서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사랑하여 젊은이들은 결혼을 한다. 내가 가진 것을 더 풍부히, 그리고 완성하고 싶다면서, 하나에서 떠나서 둘이 되어 돌아온다. 그런데 어느 날, 결혼해서 3년쯤의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한 달 내내 일벌처럼 일하다가 삼천 원짜리 이발을 했다. 아내가 천오백 원짜리도 훌륭한데 웬 삼천 원짜리냐고 못살게 군다.”
그는 그만 떠나고 싶어진다. 그것이 결혼 생활이라는 것을 3년 동안에 충분히 알았고 납득했으면서도, 결혼을 하기 전처럼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물론 그는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또다시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마음이 허한 사람처럼 떠나고 싶다. 떠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가엽게도 죽을 때까지 떠나고 싶어한다.
여자의 마음의 문도 열어보자. 옛날부터 참으라, 참으라 해서 살아온 여자들. 떠나면 항상 지금보다 못했던 여자들의 여건, 여자들은 지키는 것에 온 힘을 다한다. 차이고 밟혀도 그저 지킨다. 질기고 끔찍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여자들은 필사적으로 지켜왔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들에게야말로 몸을 태워 갈망하던 것들이 많았다. 체념하고 또 체념하려 해도 체념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우리들에게 한(恨)이 된 것은 바로 그 체념할 수 없었던 것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들은 가능만 했다면 떠나고 싶고 말고, 몇 번도 더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떠나지 못했기에 그녀들의 한은 서리서리 쌓였다.
그러나 3쳔 원짜리 이발로 남자를 구박하는 여자들은 이제 많은 한이 풀렸다. 그리고 그녀들에게서 차차 절실히 떠나고 싶었던 갈망도 잊혀져서 조그만 나의 집은 아제 낙원이 되어가고 있다. 얼굴을 수그리고 발밑만 보며 걷던 여자들은 사라지고, 빛나며 생생한 여자들만이 거리를 활보한다. 그녀들은 남편에 만족하고 아기에, 집에 만족하며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공상과 갈망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 것을 안다. 그리하여 현명한 여자들이 활보하는 거리, 마을, 그리고 길⎯.
“어디엔가 가고 싶다.”
“다음 주말엔 그 갈밭 있는 곳으로 꼭 갈 거야.”
이것은 이제 하이미스나 하는 소리일까. 계절은 하이미스에게만 있는 것일까.
오늘, 어디엔가 가고 싶다는 아가씨를 만나고 와서 나는 덩달아 그 병에 걸려 도시의 높다란 창 위에 비치는 푸른 하늘만을 자꾸 올려다본다.
떠나고 싶은 마음, 떠날 수 없이 붙잡혀 있는 마음. 떠나고서 더 견딜 수 없었던 추억, 그리고 홀연히 나에게서 떠났던 이것저것들. 나는 발밑을 보며 길을 걷는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유행과 미니스커트 / 김현승 (0) | 2018.07.04 |
---|---|
[좋은수필]칠월에 만난 풍경 / 윤영 (0) | 2018.07.03 |
[좋은수필]시간의 빈터에서 / 김열규 (0) | 2018.07.01 |
[좋은수필]고마운 악처들 / 김소운 (0) | 2018.06.30 |
[좋은수필]어머님께 / 김태길 (0) | 2018.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