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매 / 이상은
오늘 아침이었다. 아들 녀석이 등교가 늦었다며 급히 집을 나섰다. 식탁을 정리하다 보니 아들 녀석이 앉은 자리에 김포장지가 떨어져 있었다. 포장지를 치우려는데 하얀 작은 알갱이들이 보였다. 손바닥으로 쓸어 불빛에 비춰보니 하얗고 반짝이는 것이 백설탕 가루를 같았다. 혀끝에 대어보니 짠맛이 났다. 역시 소금이었다. 나는 30여 년 전에도 김에 묻은 하얀 알갱이의 맛을 본 적이 있다. 그 날은 단맛이 났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자정이 다 되어 자취방에 돌아와 보니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배가 고프던 참이라 허겁지겁 밥을 먹어치웠다. 된장찌개도 간이 맞고, 겉절이 김치도 심심한 것이 매운 것을 싫어하는 내 입맛에 잘 맞았다. 장날이라 고향에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다녀 간 듯했다. 허기가 얼추 가시자 그제야 밥상 아래 있던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파삭 소리가 나는 것이 구운 김이었다. 같은 크기로 반듯하게 잘라 가지런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할머니의 솜씨가 틀림없었다. 한 장을 집어 맛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역겨운 맛이 났다. 다른 김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에 붙은 하얀 알갱이들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니 단맛이 났다. 설탕이었다. 김은 참기름과 설탕을 섞어 발라 구운 것이었다. 할머니가 실수를 하신 듯 했다. 나는 김을 모두 내다 버리고 물로 입을 헹궜다.
며칠 후 고향집에 들렀다. 할머니가 반색을 하며 골목까지 나와 내손을 잡았다.
“할매! 할매는 음식 할 때 맛도 안 보나. 김에 설탕 뿌렸더라. 하나도 못 먹고 다 버렸다 .이제 음식 하지마라.”
나는 다짜고짜 짜증을 냈다.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맏손자인 내 얼굴을 올려다보시며 웃으셨다. 할머니는 서둘러 밥상을 차려 내왔다.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었다. 마루에 햇볕이 책보자기만큼 남아 있었다. 나는 햇볕 가운데 앉고 할머니는 내 그림자의 끝자락에 앉았다. 할머니는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이튿날 오후 자취방으로 돌아오려고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집안 여기저기를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동네 어귀를 돌아 나오자 버스길이 보였다. 할머니가 거기 서 계셨다. 파란색 완행버스가 다가오자 할머니는 손을 들어 버스를 세웠다. 할머니가 안내양에게 무엇인가 묻고 있는 듯했다. 할머니는 안내양에게 연거푸 머리를 조아렸다.
“할매요. 이 버스는 장천 안가요. 장천가는 버스는 아직 30분도 더 남았십니더. 타지도 않을 버스를 왜 세웁니꺼.”
안내양이 할머니에게 핀잔을 주었다. 나는 안내양에게 화가 났지만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남인 양 서 있었다. 할머니는 시간에 맞추지 않고 제 멋대로 도착하는 시골 버스를 나대신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떠났다.
“할매 여기서 뭐하노. 창피하게. 집에 가라.”
나는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는 내 등 뒤로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버스가 도착하자 할머니는 내 앞으로 와 비닐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구운 김이었다. 꼭 내가 내다 버린 만큼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붉어진 내 눈을 보고는 웃으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버스에 오르라는 손짓을 하셨다. 나는 고개만 꾸벅하고 버스에 올랐다. 내가 탄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고 있었다.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할머니는 그 자리에 서 계셨다.
몇 년 후, 눈이 많이 내리던 날 한 육군 일등병이 완행버스에서 내렸다. 일등병은 할머니의 부음을 받고 휴가를 얻어 꼬박 하루가 걸려 고향에 돌아왔다. 일등병은 할머니가 서 있던 그 자리에 걸음을 멈췄다.
“할매, 오늘 많이 춥데이. 할매 덕에 휴가 왔다.”
일등병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눈을 맞고 서 있었다. 부고는 전방에서 고생하는 손자에게 할머니가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내 할머니는 글을 배우지 못하셨다. 글을 몰라 시계도 볼 수 없고 버스도 혼자 탈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셨다. 오늘 보니 백설탕과 가는 소금이 많이 닮았다. 오래 전 장날, 할머니는 혼자 김을 구우셨을 것이다. 김 귀퉁이 한쪽만 떼어 먹어 보아도 알았을 텐데 설탕을 뿌리셨다. 아들이 그 때 나만큼 장성한 오늘 아침에야 알 것 같다. 할머니는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맛조차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 날 할머니는 할머니가 가진 김 전부를 나에게 주셨고 나는 한 장도 남김없이 내다 버렸다.
며칠 전 할머니 기일에 맞추어 고향 집에 다녀왔다. 제상에 올린 탕국 맛은 유난히도 깊고 개운했다. 생전에 할머니가 좋아하시던 바로 그 맛이었다. 글을 모르시는 할머니가 기일 날 오고 가시는 길이나 잃지 않으셨는지. 그러고 보니 건강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할머니 산소에 못 다녀 온지 여러 해가 지났다. 오래 전, 할머니에게 그 모진 말들을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그날은 정 많던 할머니의 기일이어서인지 고향 하늘이 유난히 맑고 파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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