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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4

[좋은수필]공룡은 살아있다 / 이혜경

공룡은 살아있다 / 혜경

 

 

 

불혹의 고지를 넘을 무렵, 별명 하나가 생겼다. 얼마 전부터 남편은 나를 공룡이라 부른다. 살다가 내가 공룡 소리를 들을 날이 올 줄이야. 한 팔에 안기는 공룡이 어디 있느냐고 볼멘소리를 해도 끝내 뱉은 말을 주워 담지 않는다. 우스갯소리인 줄 알면서도 남편 입에서 비슷한 소리만 나오면 약이 바짝 오른다.

며칠 전, 집에서 제사를 모시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더운 날씨에 뜨거운 불 앞에서 전을 부치려면 얼굴이 먼저 익었다. 엉킨 실타래 같은 나물거리를 다듬어 물에 데치는 동안 내 몸도 푹 삶긴 나물처럼 힘이라곤 없었다. 흐물흐물해진 몸과 마음을 추슬러 시루에서 막 건져낸 콩나물처럼 빳빳하게 서서 제사 시중을 들었다. 뒷정리에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니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다. 기절하다시피 침대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제사는 마쳤지만 날이 밝아도 내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어른의 식사 준비를 위해 새벽부터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무겁게 닫힌 눈꺼풀을 번쩍 들어 올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남편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있었다. 그런데 여느 때 같으면 스마트폰 보느라 눈 한 번 맞추기도 힘든 사람이 그날따라 자꾸 내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더구나 입 꼬리에 걸린 묘한 웃음기가 아리송했다. 십오 년 동안 한 이불을 덮고 잔 남편이 아침 댓바람부터 아내를 유심히 본다는 것은 필시 할 말이 있다는 징조였다.

결국 내 쪽에서 먼저 왜 자꾸 보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그제야 남편이 한다는 말이 내가 공룡을 닮았다는 것이다. 밤새 내가 숨을 내쉴 때마다 카하아하는 정체불명의 소리를 내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고 했다. 코를 곯아도 대개는 들숨에 나기 마련인데 날숨에 그런 소리를 내서 신기했다며 킥킥댔다.

건너편 방에 시부모님이 없었더라면 한바탕 바가지를 굵었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시댁의 조상님 제사 모시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는 못할망정 아침부터 애먼 소리를 해대니 부아가 치밀었다. 거나하게 취해 들어온 날이면 밤새 오토바이 엔진 소리를 내며 자던 사람이 도리어 날더러 공룡이라고 하니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다.

남편을 출근시킨 후에도 머릿속에는 공룡이 맴돌았다. 무심결에 떠오르는 유행가의 후렴구처럼 온종일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언짢은 마음도 커져갔다. 만화 주인공으로 나오는 귀여운 캐릭터도 있다지만 그래봤자 공룡일 뿐이다. 코 좀 곯았기로서니 하룻밤 만에 그런 생각이 날 리 만무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마누라를 볼 때마다 머릿속으로 공룡을 떠올려 왔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나의 어떤 모습이 남편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이 들도록 만들었을까.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 발을 들여놓은 후부터 여러 가지가 바뀌었다. 아줌마라는 계급장은 위력이 대단했다. 오죽하면 아줌마를 일컬어 남자고 여자도 아닌 제 삼의 성이라고 했을까.

얼굴 두께부터 확연히 달라졌다. 얇은 습자지처럼 속마음이 그대로 비쳐 보이던 얼굴이 두꺼운 마분지로 변했다. 소싯적에는 부끄럼을 많이 타서 짓궂은 농담 한 마디에도 금세 뺨이 발그레해졌다. 남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말 한 마디, 몸가짐 하나까지 흐트러지지 않도록 늘 신경을 쓰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웬만한 이야기를 들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다. 늘어난 잡티를 기리느라 화장이 짙어진 탓도 있겠지만 수위가 제법 높은 짓궂은 이야기에도 웃으며 맞장구를 칠 정도로 얼굴이 두꺼워졌다. 거울을 손에 달고 살았던 내가 이제는 눈곱만 대충 떼고 민낯으로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할 만큼 뻔뻔해졌다.

힘은 또 얼마나 세졌는지 모른다. 나무둥치 몇 개쯤은 가볍게 들어 올리는 힘 센 공룡처럼 이제 쌀 한 포 쯤은 가뿐하게 나른다. 시장을 보러 가면 장바구니가 미어터지도록 물건을 잔뜩 담아도 너끈히 들고 온다. 손가락마다 비닐봉투를 겹겹이 쥔 채로 현관 비밀번호를 척척 누를 정도로 내공이 쌓였다. 작은 박스 하나도 들지 못해 끙끙대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인지 팔뚝도 예전보다 굵어졌다. 어떤 연구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여자들은 삼사십 대 때 근육이 가장 발달한다고 한다. 집안일과 아이 돌보는 일을 많이 하는 시기라 근육이 단련 되어서 생생한 이십 대 아가씨보다 힘이 훨씬 세다는 것이다. 내 경우도 결혼 전보다 힘이 몇 배는 세진 느낌이다.

수렵과 채집에 능한 것도 공룡과 비슷한 점이다. 마트의 할인 코너 앞에 서면 갑자기 전투력이 상승한다. 멀리서 물건을 고르다가도 한정 세일이라는 방송이 나오면 먹잇감을 발견한 공룡처럼 돌변한다. 카트를 끌고 빛의 속도로 달려가 경쟁자들의 어깨를 밀쳐가며 줄을 선다. 세일이 끝나기 전에 하나라도 더 담으려고 팔을 뻗고 고개를 쭉 뽑아가며 육탄전을 벌인다.

어렵게 사냥해 온 재료들을 손질하는 것도 익숙하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낙지나 꽃게도 단칼에 제압해 버린다. 무 자르듯 생선 대가리를 자르는가 하면 핏기가 남은 내장을 손가락으로 헤집을 수 있을 정도로 비위가 졸아졌다.

공룡이 덩치가 컸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적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많이 먹어서 몸집을 키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들이 생존을 위해서 몸집을 키웠듯이 나 역시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키운다는 핑계로 먹는 양이 늘었다. 가족들의 식사가 끝나고 나면 아깝다는 이유로 남은 음식을 쓰레기통이 아닌 뱃속에다 비울 때가 더 많다. 풀이든 고기든 가리지 않고 고루 쓸어 담는다. 어쩌다 공짜로 밥 먹을 기회라도 생기면 체면일랑 벗어 던지고 손과 입이 쉴 새 없이 바쁘다.

나도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은 비록 무서운 것이라곤 없을 것처럼 거세 보일지 몰라도 꿈을 먹고 살아가던 소녀 시절이 있었다. 푸릇한 이십 대 시절에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콧대 높은 아가씨라도 결혼이라는 현실 속으로 들어온 이상 스스로 변해야만 했다. 어쩌면 한 과정을 거칠 때마다 강하게 바뀔 수밖에 없도록 정해진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세 배역을 한꺼번에 소화해 내려면 겉모습은 물론이고 알맹이까지 단단해지고 우람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원래부터 내 안에는 공룡이 숨어있었던 것인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스스로 변해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동안 나는 진화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공룡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화석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 우리 안에 남아 있다.

땀을 한바가지 쏟아가며 저녁 준비를 하는데 띵동소리와 함께 문자 한 통이 날아든다. 술 약속이 잡혀서 남편이 늦는다는 소식이다. 미라 좀 알려주면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렇게 배려가 없다. 밥솥의 추를 열자 뜨거운 김이 확 빠져 나온다. 내 머리에서도 뜨거운 김이 난다. 한 마디라고 쏘아붙여야 온도가 내려갈 것 같다. 손끝에 힘을 잔뜩 실어 문자를 찍는다.

열두 시를 넘기면 안방에서 공룡이 불을 뿜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