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비가 된 가자미 / 강병숙
며칠 전 예전에 살았던 동네 앞을 지나다 문득 주변에 있는 재래시장을 둘러보고 싶었다. 장을 볼 것도 아니면서 선뜻 발을 들여놓았고 기웃기웃하다 생선가게 앞에서 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주인은 할머니였는데 아는 사람처럼 “갈치 한 무더기 사만 원인데 새 갈치만 맛은 있어”하시는 게 아닌가.
한 마리에도 만원이 넘는 게 갈치인데 아무리 잘아도 한 무더기는 싸다 싶어 다시 한 번 쳐다보다가 차를 탈 처지라 그냥 돌아섰다. 그러다 장바닥을 다시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올 때다. 할머니는 또 나를 봤는지 “국산이고 냉동이 아닌 생물이라 맛있다니까?”하시며 싼 갈치를 사러 다니는 사람처럼 보이는지 두 번 세 번 강조하셨다.
할머니, 저 갈치 사러 온 것 아니에요. 하려다 손님 한 병 없는 가게에서 나만 보고 말을 하는 할머니가 안 돼 보여 주춤하는데 할머니는 또 금방 한 말을 반복하셨다. “저 지하철을 타야해 안 돼요.”하니 할머니는 당신이 자신 있게 비린내가 안 나게 해주겠다며 한 무더기를 송두리째 도마 위에 올리셨다. 어쩔 수 없어 발을 멈췄는데 할머니는 다른 손님이 와서 값을 묻고 구경해도 꿈쩍도 하지 않고 다 다듬으시더니 소금을 약간 친 다음 “지하철 탄다고 했지?”하며 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투명 비닐봉지에 넣으시더니 봉지 겉에다 신문지를 두르고 그런 다음 반대로 또 신문지를 한 번 더 두르고, 그 다음은 손을 깨끗이 닦더니 검정 비닐봉지에 넣어주셨다.
받아들고 코를 대 보니 염려스러운 비린내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가방에 넣으면서 또 코를 대 보고, 봉지 위에는 차 안에서 보던 신문을 덮었다. 생선을 가방에 넣고 지하철을 타는 건 처음이라 마음이 쓰이는데 오래전 동생의 책가방이 떠올랐다.
막냇동생이 막 대학에 들어갔을 때다. 처음엔 우리 집에서 다녔는데 차를 타면 학교가 두 시간 거리였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 지하철을 타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자정이 다 돼 가는데도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시계에만 눈을 두고 있다가 애가 타 골목으로 나갔다. 경사가 진 골목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가로등이 환하게 켜진 길에서 아무리 목을 빼도 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동네 어귀까지 나가 봐도 보이지 않았다.
시커먼 물체만 보여도 행여 동생인가 싶어 이름을 불렀지만 그것은 바람이 만든 가로수의 그림자였지 동생은 아니었다. ‘서울 지리를 아직은 잘 모르는데….’ 싶으면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에서 본 덩치가 크고 시커먼 옷을 입은 사내들의 모습이 떠오를 때는 우렁우렁 소리까지 들리는 듯해 귀를 꼭 막았다. 그렇게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동생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나는 늦은 이유를 묻기 전에 소리를 질렀다. “지금이 몇 시야, 무서운 줄도 모르니?”하며 목소리가 되는 데까지 큰소리로 물었다. 변명하려도 드는 동생에게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길에서 애를 태운 것을 못 삭여 그저 씩씩거렸다. 그런 후 집으로 왔는데 동생 몸에서 왈칵 비린내가 났다. 웬, 비린내 싶어 바짝 다가가니 동생은 늦은 이유를 말하였다.
학교 도서관에서 나와 지하철을 탔는데 옆자리 주부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한바탕 소동을 벌였고, 주부의 지갑 속에 버스비가 들어있다며 안절부절못하였단다. 사정이 딱한 주부에게 동생은 달랑 남은 자기 버스비를 주었고 주부는 남의 돈을 그냥 받을 수 없다며 그 순간 내놓을 것이라곤, 낮에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한 생선 가자미가 전부라 그것이라도 주겠다고 꺼내었단다.
옷섶에 얼룩 하나도 없는 초보 대학생한테 난데없이 생선을 받으라고 하니 어리둥절하면서 싫다고 했고, 주부는 이 절박한 순간 누가 선뜻 차비를 주겠냐며 동생 책가방을 끌어당겼단다. 그러면서 이물질이 책에는 묻지 않게 넣어줄 테니 가방을 잡기만 해 달라고 통사정을 해, 마지못해 그 많은 승객이 지켜보는 앞에서 비린내가 물씬 나는 가자미를 받아 넣었단다.
책도 무거운데 한두 마리도 아닌 가자미까지 등에 메고 지하철에서 내려 버스로 와야 할 길을 걸어서 왔으니 늦을 수밖에 없었다. 말을 듣고 나니 영문도 모르고 소리부터 지른 게 미안했다.
동생은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다. 9남매 막내다 보니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어도 귀염을 받았고 아기였을 적에는 형, 누나들이 돌아가면서 업어주어 포대기에 싸여 울음을 울새도 없었다. 맛있는 음식은 아버지 다음으로 먹을 수 있었고 유별나게 공부도 잘해 학교에서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상장도 셀 수 없을 만큼 탔을 뿐더러 착하기도 해 학교생활 내내 반장을 맡았다. 모범이라는 꼬리표는 언제나 동생 몫이었고 시골에서 자랐지만 손에 흙 한 번 묻히지 않고 자란 동생을 우리는 늘 귀여운 선비라고 불렀다.
그런 동생이 책가방에 생선을 넣어 오다니, 나는 그날 밤 주머니가 텅 빈 옷을 입고 다닌 동생이 가련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더 어렵게 공부는 했지만 그렇게 사정이 딱한 줄은 몰랐다. 허구한 날 빨랫감 많이 내놓는다는 둥 온갖 잔소리만 해댄 나였다.
완강히 뿌리쳤으면 안 받아 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이라도 내놓고 나한테 환심을 사고 싶었을까.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끊임없이 따라붙었을 비린내를 등에 지고 낯선 밤길을 걸었을 동생을 생각하니 기다란 형광등에서 어둠을 밀어낸 불빛이 내 가슴에는 검은 그림자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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